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나도밤나무 주의

bindol 2022. 11. 1. 16:26

[이규태코너] 나도밤나무 주의

조선일보
입력 2003.08.03 22:26
 
 
 
 

나도밤나무라는 키가 훤칠하고 노란 꽃이 눈길을 끄는 관상수가 있다. 한데 잎이 밤나무와 닮았다해서 나도밤나무다. 우리 한국 사람이 그 나무를 밤나무로 하고 싶어 준 이름이다.

나도밤나무뿐 아니라 나도냉이, 나도송이풀, 나도박달, 나도바람꽃, 나도생강, 나도미꾸리 등등 독자적 개성을 과시하느니 이미 알려진 유사성에 동조하여 개성을 접어버리는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투영된 것이다.

회의나 세미나에서 반대의견이 나오기 힘든 것도 나도밤나무주의의 표출이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알았습니까 하면 몰라도 예하고 대답하는 것이 선생님에 대한 의리가 돼 있다.

윗사람이 설렁탕 하면 기호와는 아랑곳없이 나도 나도 동조하고 윗사람이 웃옷을 벗으면 나도 나도 동조하여 벗는다. 우리나라 관광지에 그곳 특유의 관광상품이나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나도밤나무주의의 소치다.

수천년 농사를 지어먹고 한 마을에 더불어 살아온 정착민족인지라 독불난 이견이나 행동은 자제받거나 자제하는 남나름의 나도밤나무주의가 사회안정의 조건이었다. 이와는 달리 유목이나 상업 이동민족들은 각기 다른 이견과 개성을 존중하는 ‘나는아닌밤나무’ 주의다.

 

카터 미국대통령이 이스라엘 국회에서 연설했을 때 짓궂기로 소문난 코헨 의원이 말끝마다 물고늘어져 국빈을 곤혹케 하자 만장일치로 코헨의 퇴장을 의결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퇴장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관습법으로 소수의견을 존중하는 뜻에서 반대의견 없는 만장일치는 무효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아닌밤나무’를 존중했던 것이다.

얼마 전 세계 대학총장 모임인 옥스퍼드 테이블에서 정운찬 서울대학총장은 한국대학들이 교육의 질과 능력과는 아랑곳없이 남이 하니까 나도 하는 나도(me too)주의가 한국대학들의 질을 저하시키고 있다고 했다.

곧 나도밤나무주의의 대학침투가 대학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학이 살려면 나는 아닌밤나무 곧 우리대학에서만 가르치고 할 수 있는 개성을 정립하지 않고는 난립하는 대학과 피교육자원의 감소로 인한 위기를 벗어날 수 없게 돼 있다.

대학 선전하는 것을 보면 거의 나도밤나무식인데 예외가 없다. 예비학생이나 학부모들은 나는아닌밤나무를 찾고 있는데 말이다.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