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낮잠

bindol 2022. 11. 2. 06:02

[이규태 코너] 낮잠

조선일보
입력 2003.06.26 19:25 | 수정 2003.06.26 22:11
 
 
 
 

공자의 10대 제자 가운데 재여(宰予)는 스승에게 사사건건 대든 문제의
제자였다. 공자가 3년 친상(親喪)을 내세우자 격식에 얽매여 공경하는
진심을 도리어 해친다 하여 1년상을 주장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재여가
점심 먹고 낮잠 자러 침실에 드는 것을 보자 공자는 말했다.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할 수 없고 진이 빠진 흙으로는 벽을 칠 수 없다'고
촌각을 아껴야 할 학자로서 낮잠 자는 것을 두고 장래를 점친 것이었다.
후에 제(齊)나라 대부로 출세하자 재여의 낮잠은 썩으려 하는 나무에
생기를 주고 푸석한 흙에 진기를 주는 행위였다 하여 격식보다
실사(實事)에 비중을 둘 때 곧잘 인용하는 낮잠이 되었다. 곧 스승의
꾸지람과 실망을 무릅쓰고 낮잠은 악덕이 아님을 실천한 재여는 낮잠
긍정론자다.

중국사에서 명석한 사리판단으로 하후은(夏侯隱)을 치는데 산을 오를
때나 물을 건널 때에도 졸면서 걷고 건넜다. 동행하는 사람이 코고는
소리를 들을 정도인데도 징검거리 하나 헛딛지 않았다 한다. 곧 낮잠이
머리를 명석하게 해준다는 과학을 먼 옛날에 실천했다 할 수 있다.
장개석의 낮잠은 유명하다. 전쟁 중에 시급한 작전 결정일지라도 낮잠
후로 미루었다.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틀어놓고 자 버릇했는데
노래가 끝나 치익치익 소리가 나면 옆방에서 잠든 것을 확인하곤 했다
한다.

15 초 후 SKIP

개화기에 외국인들이 써남긴 한국 관리들의 행태로서 자주 거론된 것이
출근할 때 사동으로 하여금 결재 도장이 든 인끈과 장죽, 그리고
돛자리와 목침을 들리고 행차한다는 것이다. 육조(六曹)의 관아마다 맨
가장자리 곁방을 낮잠 공간으로 비워두었으며 고관들은 그 낮잠 도구를
휴대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게으른 행태로 지탄했지만 낮잠 공간을
공식화한 데는 반드시 게으름만이 아닌 발전적 저의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두뇌 가운데 잡다한 외부자극을 수용, 판단하여 그에 준한 행동을
명령하는 간뇌(間腦)라는 게 있다. 바삐 살다보면 마치 전화 교환대처럼
혼선으로 마비되는 경우가 자주 생기며, 그것을 가지런하게 해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낮잠이라 한다. 미국 하버드대 연구팀에서 1시간 안팎의
낮잠이 기억력이나 판단력·분석력을 높여준다는 실험결과가 보도되어
옛사람들의 낮잠을 둔 선견들을 살펴보았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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