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개와 살인증언

bindol 2022. 11. 2. 07:54

[이규태 코너] 개와 살인증언

조선일보
입력 2003.05.26 19:38
 
 
 
 


10여년 전 모스크바 공항에서 주인을 기다리며 2년 동안 보세구역
문전을 떠나지 않았던 개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일본 나고야항에
하역을 마친 독일선박이, 하주가 데리고 탔던 개가 뭍에 나간 줄 모르고
항구를 떠났다. 이 개가 안벽에서 먼 바다만 바라보고 떠나려 하지 않자
하역인부들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었고 개는 허기를 메우며 마냥
기다렸다. 개 주인도 대단한 애견가였던지 한 달 후에 개를 찾아 회항을
했고 제가 탔던 배를 보자 달려가 트랩을 올랐던 것이다.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애견은 왕비가 갇히자 옥문 앞을 떠나지 않더니
강제로 격리시키자 탈출하여 센강에 몸을 던졌다. 「개 백과사전」에
보면 조니라는 영국 개 사진이 크게 실려있는데 길거리에서 돈 주머니나
지갑을 주우면 파출소에 물고 가기를 자주 하는 정직한 개로 소개돼
있다.

사흘만 기르면 삼년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게 한국 개다. 그 한국 개의
주인을 둔 충직 농도는 상대적으로 진한 편이다.
「청구야담(靑丘野談)」에 하동(河東)에서 어린 딸과 동비(童婢)를
데리고 사는 한 과부집 노랑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느 날 밤 이웃에
사는 모갑(某甲)이 담 넘어와 겁탈하려 드는데 완강히 거부하자 목졸라
죽이고 들킬까 봐 딸과 동비마저 죽여 증거를 인멸했다. 관에 고하는
사람이 없어 모르고 있는데 과부집 노랑개가 관가 앞에서 아무리 쫓아도
가지 않고 동헌을 쳐다보고 짖기만 했다. 수상히 여겨 포교를 딸려
보내니 10리 밖 집에 이르러 방 안을 향해 짖어대는지라 방문을 열어보니
시체 셋이 널려 있었다. 이를 보고자 많은 동네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데 이 노랑이가 그중 한 사람의 바지를 물고 늘어지는지라
이를 잡아 문초하니 범행을 자백했다. 바로 하동 의구총(義狗塚)의
내력인 것이다.

서울 송파의 20대 세 남녀 살해방화 사건의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경찰은 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존재인 애완견 시추를 데려다 개소리
번역기까지 부착하여 용의자들 앞에 내세웠다. 하동의 노랑이 같은
기지를 기대한 것이었을 게다. 한데 오히려 경찰관에게 기어오르고
번역기에도 일관성이 없어 실패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개마저도 애완
과보호로 충직의 뼈대가 물러졌거나 한국개만큼 정신적 뼈대가 튼튼하지
않은 외국 애완견이기 때문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