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文一平

bindol 2022. 11. 3. 16:18

[이규태 코너] 文一平

조선일보
입력 2003.05.11 20:21
 
 
 
 


서울 망우리 묘지공원에는 건국훈장을 받은 12분의 애국지사 묘역이
있다. 3·1운동 민족대표 한용운(韓龍雲)·오세창(吳世昌)의 무덤을
지나면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의 무덤에 이르는데 그 기록비(記錄碑)
전면에 '조선 독립운동은 민족이 요구하는 정의 인도로서 대세 필연의
공리요 철학이다'고 새겨져 있음을 본다. 기미년 3월 12일 호암이 손수
짓고 손수 보신각 앞에서 낭독한 '다시(又)독립선언서'로 불리는
'애원서' 속의 한 구절이다. 호암은 이 사건으로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 이전에 중국 남경에 건너가 임시정부 대통령인
박은식(朴殷植), 국무총리인 신규식(申圭植)과 비밀결사(同濟社)에서
일했고 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홍명희(洪命熹) 등과 함께
기식하며 국권 회복을 꾀했다.

1930년 전후하여 일본제국주의가 민족의 목 조이기에 악독해갔고, 문화가
살면 민족은 죽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빈사(瀕死)의 민족문화를 살리는
쪽으로 민족운동이 방향을 틀고 있었다. 이 대항을 위한 민족문화의
통칭이 필요했고, 그래서 생겨난 것이 '조선학(朝鮮學)'이요,
조선일보를 터전으로 조선학 운동이 일어난 것도 이 즈음이다. 홍명희의
'임꺽정', 한용운의 '삼국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안재홍의
'충무공 탐방'이 연재되고 당시 국학자를 총망라한
'조선여지승람(朝鮮輿地勝覽)' 연재도 조선학 운동의 일환이다. 이
운동의 핵심인물이 호암이다. '한미외교사' 101회를 비롯, 5년 동안에
총 400여편 원고지 10만여장의 방대한 조선학을 발굴했는데, 후세에
문화운동이 아니라 민족운동이라 평가받은 것은 그 저류에 흐르는 민족혼
때문일 것이다.

지팡이 짚고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 한용운 찾아다니며 만년을 살았던
호암이 임종한 내자동 집, 열린 동창으로 기절(氣節)의 싱징
백송(白松)이 내다보이고 임종의 머리맡에는 야국(野菊)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야인의 수더분함과 외곬고집, 질긴 생명력으로 호암의 일생을
상징하는 야국이다. 5월의 독립인물로 기리게 된 호암의 조선학이 물리적
말살에서 민족을 구하는 깃발이었듯이 사대 외래사상의 기승으로 민족
자질이 퇴색하고 있는 오늘에 한국학의 위상을 뒤돌아보게 하는
호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