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잡초 정치인

bindol 2022. 11. 3. 16:20

[이규태 코너] 잡초 정치인

조선일보
입력 2003.05.09 19:44
 
 
 
 


작물의 자양을 빼앗고 볕과 물을 가로채 잘 자라지 못하게 한다 하여
잡초는 뽑아 없애야 하는 악의 대명사다. 노 대통령이 제거돼야 할 잡초
정치인 네 유형을 제시, 이메일로 띄운 것이 정가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를 두고 정치인들 할 말이 많겠지만 잡초도 할 말이 없지 않다.
잡초 정치인의 긍정적 측면도 많기 때문이다. 어릴 적 논둑에서 꼴
베면서 부르던 노래가 있다.
「보리뺑이―개자리/달구지풀―제비꽃/각시제비―민둥뫼/졸랑제비―왕제비―.」
이 모두 시골에
흔했던 잡초 이름들로 꼴 벨 때 베어서는 안 되고 나물 캘 때 캐어서는
안 되는 잡초들이다. 이 잡초가 자라는 곳에 다른 잡초가 자라지 못하고
작물에 꾀는 벌레를 쫓기 때문이다. 잡초 가운데는 이 같은 익초(益草)가
해초(害草)보다 많았다. 우리 정치인 가운데 드러내지 않고 생색내지도
않으며 아무도 모르게 후광으로 익초 노릇을 하는 잡초 정치인을
보았는가.

질기다 하여 질경이는 마소가 밟고 수레가 굴러다니는 길 복판만 찾아
피어나는지라 밟을수록 더 푸르고 잘 자라, 억눌려 살았던 서민에게 삶의
용기를 북돋아왔던 잡초로 민족의 저력이기도 하다. 이같이 끈질기고,
밟혀가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잡초 정치인이 과연 누구요. 쓰레기
무덤인 난지도가 파란 초원으로 변했다. 악취와 가스 분출로 작물을
심어도, 화초를 심어도 살지 못하는, 그 버림받은 땅을 초원으로
바꿔놓은 것이 잡초다. 강원도 산불이 거쳐간 자리, 죽음의 검은 땅에서
파릇파릇 생명의 창을 연 것도 잡초다. 이처럼 후미진 곳에서 악조건과
싸워 희망을 준 잡초 정치인을 보았는가.

해동 무렵 히말라야 얼음 속에서 맨 먼저 돋아나는 것이 노란 밥풀꽃
잡초다. 현지 셀퍼들은 이 잡초를 보기만 하면 합장하고 그 한 해의 복이
약속됐다 하여 기뻐 날뛴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가스실로
집단 처형당하러 가는 행렬이 담벼락 틈에 피어난 노란 꽃의 잡초를
보고들 낱낱이 죽음의 공포를 날렸다는 기록은 감동적이다. 거기 어데
이렇게 희망을 주는 잡초 정치인은 없소. 1세기 전만 해도 클로버는
들판의 한낱 잡초에 불과했다. 이 잡초를 찰스 다윈이 재배하여 근대
영국의 부강이 클로버에서 비롯됐다 할 만큼 위대한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 잡초요, 그런 잡초 정치인이 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