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소를 탄 대통령

bindol 2022. 11. 4. 16:26

[이규태 코너] 소를 탄 대통령

조선일보
입력 2003.04.21 19:28
 
 
 
 


임진왜란 전에 임금의 명에 따라 곽재우(郭再祐) 이순신(李舜臣)
김덕령(金德齡) 등 명장을 천거한 것은 정승 정탁(鄭琢)이었다.사람 보는
눈이 투철했던 정탁이 만년에 남긴 말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젊었을 때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뵈었는데 작별에 즈음하여 "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는데 군이 끌고가게나" 했다. 집에 소가 없으면서
끌고가라는 말에 어리둥절하자 남명이 말하길 "자네의 언어와 의기가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만 같아 넘어지기 쉬운지라 더디고
둔한 것을 참작하여야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므로 내가 소를 준다는
것일세" 했다. 그 후 대성한 것은 선생이 주신 마음의 소 때문이라
했다.

옛날 훈장이나 스승한테 문안을 하거나 세배를 가면 그 자리에서 글
한두 자 써 봉투에 담아 건네주었는데 이를 세뱃글이라 했다. 그 글을
머리맡에 붙여놓고 연중 조석으로 보고 품행을 다스렸는데, 성질이
급하고 꾸준하지못한 이에게 써준 세뱃글은 우행(牛行)이었다. 집착하는
데 없이 변심이 잦은 아이에게는 뚝심이나 고집을 뜻하는 우심(牛心)이라
써주었으며, 나약하고 뒷심 없이 매사에 기력이 없으면 우력(牛力)이라
써주었다. 위(魏)나라 때 앞으로 가는 소꼬리 붙들고 끌어 뒷걸음질치게
하면 장수로 추대받았을 만큼 소 힘은 세었다. 멱우(覓牛)라는 세뱃글도
보았는데, 남에게 구하거나 의존하거나 경쟁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구하고
스스로와 싸워 이기라는 교훈이다. 곧 요즈음 흔히 말하는
대타경쟁(代他競爭)이 아니라 대자경쟁(對自競爭)이 멱우다. 아마 소가
뚝심이 있고 꾸준한 것이 스스로를 다스린 때문으로 보았기에 생긴 말인
것 같다. 이처럼 한국사람에게 많은 인생교훈을 주어온 소요, 그래서
한국인에게 친근하고 편안하며 신뢰이미지를 구축해온 소다.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띄운 대국민 공개서한에서 자신의
개혁방법이 대립적이거나 과격하지 않다 하고 소처럼 묵묵히 꾸준히
가겠다는 우행(牛行)임을 다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존슨 대통령에게 서부
프런티어 이미지가, 카터 대통령에게 남부 평화 이미지가 역사에 위상을
잡아주듯 한 시대 한 나라의 지도자는 이미지 관리로 성패가 좌우된다
해도 대과가 없다. 이제 국민은 청와대에 매여있는 대통령의 소에 시선이
집중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