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師弟 洗足

bindol 2022. 11. 7. 07:14

[이규태 코너] 師弟 洗足

조선일보
입력 2003.04.18 20:06
 
 
 
 


육체의 때만 씻는 게 아니라 마음의 때를 씻는 정신 세척문화가 별나게
발달했던 우리나라다. 사도세자를 증오했던 영조께서는 세자의 말소리만
들어도 부정 탔다 하여 세숫물 떠 오라 시켜 귀를 씻는 귀씻기(洗耳)를
했다.깐깐한 옛 선비들은 길 가다 방아소리만 들어도 성행위를
연상시킨다 하여 귀씻기를 했다. 못 볼 것을 보았을 때나 흥분해서 못 할
말을 했거나 하면 발걸음을 재촉, 집에 돌아와 눈씻기, 입씻기를 하여
그로써 마음에 묻은 때를 세척했다. 그러하듯이 기생, 노름, 마약,
깡패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온다 할 때도 발을 씻는다 했다.

불교 성지에 가면 불족석(佛足石)이라 하여 부처님 발자국을 음각해
놓은 돌이 있고, 예루살렘의 암석사원에는 마호메트가 승천하면서 낸
발자국이 있으며, 그리스도가 승천한 올리브산상에도 발자국이 있어
순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순례자는 그 성적(聖蹟)에 접하고자 깨끗이
세족을 했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의 세족은 그리스도가 성(聖)목요일
최후의 만찬장에 도착했을 때 12제자들이 누가 더 그리스도의 훌륭한
제자인가를 다투는 것을 보고 아무 말 없이 차례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데서 비롯되었다. 배신자인 유다의 발도 예외 없이 씻어주었다.

영국에서는 이 부활 전 목요일에 국왕이 빈민들의 세족을 하여 빈부간의
위화를 좁혀왔는데 특히 엘리자베스 1세는 그 씻은 빈민의 발에 키스를
하기까지 했다. 이 세족식이 우리나라에서 더불어 사는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앙금을 풀며 신뢰를 쌓는 행사로 종종 베풀어져왔다.
대학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환자의 발을 씻어줌으로써 불신을
증발시킨다든지, 혹한 속의 일선에서 하사관과 장교들이 물을 따습게
데워 사병들의 발을 씻어줌으로써 신뢰를 두텁게 했으며, 지방 유지들이
불량학생들의 발을 씻어주기도 했다. 엊그제 명지대학에서는 교수 30명이
300명의 학생 발을 씻어주는 세족식을 가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국적인
발씻기라면 제자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의례요, 기독교적인 발씻기라면
사제간의 거리를 사랑으로 좁히는 의례랄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 다만
한발 물러서 스승의 그늘을 밟지 않는다는 사제관(師弟觀)으로는 세상
너무 많이 달라졌음을 실감케 하는 사제 세족이다.

'이규태 코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규태 코너] 흰 진달래  (0) 2022.11.07
[이규태 코너] 星條旗 主義  (0) 2022.11.07
[이규태 코너] 최저 출산국  (0) 2022.11.07
[이규태 코너] 소를 탄 대통령  (0) 2022.11.04
[이규태 코너] 쿠르드 인  (0) 2022.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