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바그다드 동물원

bindol 2022. 11. 4. 16:22

[이규태 코너] 바그다드 동물원

조선일보
입력 2003.04.23 20:06
 
 
 
 


10수년 전 남극 탐험대가 썰매 끄는 데 부린 개들의 처리를 두고
영·일(英·日) 간에 논쟁이 벌어졌었다. 영국탐험대는 그 개들을
사살하고 돌아왔고, 일본 탐험대는 양식을 남겨두고 울며불며
돌아왔었다. 사살한다는 것이 잔인하다는 의견과 아사지경에서 서로를
잡아먹게 두는 것이 잔인하다는 의견이 대립되어 서로가 자기네 행위가
자비롭다고 주장했던 기억이 난다. 이 동서 자비논쟁은 실마리 찾지 못할
영원한 쟁점일지 모른다.

전쟁이 일어나 폭격이 예상되면 동물원의 맹수를 없애는 것이 관례다.
우리를 뛰쳐나와 사람에게 해를 끼칠 우려에서 독살하게 마련이다.
2차대전 중에 있었던 동물원 맹수 독살 사례를 보면 사자가 독이 섞인
먹이를 토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볼 수 없어 창으로 심장부를 찔러 죽인
사례며, 독약이 듣지 않은 대사(大蛇)를 해부칼로 난도질해 죽이고 그
때문에 충격을 받은 사육사들이 헛소리 하고 몽유병자처럼 방황하는
사례도 기록에 남아있다. 코끼리는 독이 든 야채를 입에 대려 하지 않아
아사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절식 후 굶주린 코끼리는 나날이
쇠약해가면서 사육사가 지나가면 행여나 먹이를 줄까봐 힘겨이 몸에
익혔던 재주를 부려 보이기도 하여 눈물을 자아내게도 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카불 동물원에서 기르고 있던 눈먼 사자를
사살하러 탈레반 병사가 들이닥쳤다. 봉급 8달러로 친자식처럼 길러온
사육사의 애원으로 사살을 면한 눈먼 사자 이야기는 당시 세상사람들
흉금을 울렸었다.

이번 전쟁을 치룬 바그다드 동물원에는 이라크군 야전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한다. 미군이 동물원까지 폭격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인간방패
아닌 동물방패를 삼았을 것이다. 혹은 맹수를 사살할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미군의 속전(速戰)으로 폭격은 면했으나 미군이 이곳을 점거했을
때는 굶어죽기 직전의 사자 네 마리가 우리를 탈출, 사살당하는 비극이
보도되었다. 박물관처럼 약탈의 손을 면할 수 없었던 동물원에도 말
원숭이 낙타 조류 등 순한 짐승은 모조리 약탈당하고 탈출 못하고
남아있는 맹수들은 미군에 의해 급송된 사료로 생명을 부지하게 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전쟁의 비극은 인간사회만도 아님을 절감케 하는
바그다드 동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