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후세인과 살라딘

bindol 2022. 11. 7. 18:17

[이규태 코너] 후세인과 살라딘

조선일보
입력 2003.03.21 19:36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은 십자군 전쟁 때 성지 예루살렘을 90년 만에
탈환한 아랍의 영웅 살라딘을 자처했다. 근 90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둔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분모가 있다. 둘 다 바그다드의 북쪽 타크리트에서
태어난 동향인이다. 살라딘은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면서 영지(領地)를
군인에게 나누어주어 명령에 멸사봉공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군사토지
제도를 썼으며, 그 주종관계를 맺을 때 서로의 피로 쓴 코란의 한 구절을
교환함으로써 확고부동하게 했다. 지금 바그다드의 교외 「싸우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회교사원에는 피로 쓴 코란의 경문이 전시되어
이라크 국민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바로 후세인
대통령의 몸에서 뽑아낸 13ℓ의 피에 보존 약품을 섞은 피 잉크로
605매의 종이에 필사한 사경(寫經)으로, 자신과 이라크 국민과의 정신적
유대를 그로써 끈끈히 한 것도 살라딘의 피의 계약과 흡사하다. 후세인은
자신을 살라딘과 복합시키는 정략까지 썼다. 살라딘이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킨 것을 자임하여 대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자살 테러를 지원하고
테러범의 유가족 돕는 일을 지속해온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흡사하지 않은 측면도 적지 않다. 살라딘은 이란·이라크·터키에
분산해 살면서 압박받으며 살아온 약소민족인 쿠르드족 출신인데
후세인은 압박을 가해온 민족이라는 것이 다르다. 살라딘은
수니파·시아파의 종파를 초월, 이슬람국가들의 맹주로서 신망을
얻었지만 후세인의 경우는 동정은 사고 있을지 몰라도 아랍국가들이
방관하고 있다는 것도 다르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비롯, 팔레스타인의
도시들을 점령했을 때 무자비한 학살을 했다. 하지만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나 자신이 이르는 곳마다 그리스도 교도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복수하지 않는 관대함을 보였다. 한데 후세인은 국민을
결속하려는 수단인지는 몰라도 적개심과 복수를 부르짖고 가열시키고
있다는 것도 다르다. 「십자군과 맞서 아랍을 지킨 살라딘이 될 것」을
자임한 후세인의 재산은 미지수이지만, 살라딘이 다마스커스에서
말라리아에 감염, 세상을 떴을 때 그의 총재산이라고는 호주머니에서
나온 은화 하나가 전부였다 해서 이슬람권만이 아닌 세계적 위인이 돼
있다는 데에서도 후세인과의 복합이 들어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