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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박중현]한국판 ‘말뫼의 눈물’박중현 논설위원

bindol 2022. 11. 8. 16:22

[횡설수설/박중현]한국판 ‘말뫼의 눈물’

입력 2022-11-02 03:00업데이트 2022-11-02 03:24
 
스웨덴은 조선업이 일찍부터 발달한 나라였다. 1885년에 어뢰를 탑재한 잠수정을 세계에서 처음 만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조선업을 주도하던 최남단 항구도시 말뫼는 1970년대 일본, 한국의 조선업에 밀려 빛을 잃기 시작했다. 말뫼의 대표 조선소인 코쿰스에 1973년 세워졌던 높이 140m의 골리앗 크레인은 1987년 조선소 파산 후 오랫동안 무용지물로 남아 있다가 2002년 현대중공업에 팔렸다. 가격은 단돈 1달러였다.

▷세계 조선업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넘어간 걸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현대중공업이 골리앗 크레인을 해체해 울산행 배에 싣던 날 스웨덴 국영방송은 레퀴엠을 튼 채 중계방송을 했다. 조선업 붕괴로 인한 실업 증가와 인구 감소를 겪고 있던 말뫼의 시민들은 이 장면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름하여 ‘말뫼의 눈물’이다.

▷2010년 전북 군산시에 세계 최대 규모 독과 골리앗 크레인을 갖춘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가 준공됐다. 준공식도 열기 전에 배를 만들어 팔았을 정도로 경기가 좋았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시작된 조선업 장기 불황으로 2017년 7월에 결국 가동이 잠정 중단됐다. 근로자 5000여 명이 일자리를 잃고, 협력업체 90%가 문을 닫거나 군산을 떠나면서 ‘한국판 말뫼의 눈물’이란 말이 나왔다. 다음 해인 2018년에 한국GM 군산공장까지 폐쇄돼 지역경제는 더 황폐해졌다. 그랬던 군산조선소가 지난달 28일 5년 3개월 만에 재가동 선포식을 열었다.

 
▷당초 계획보다 2개월 앞당겨진 이번 재가동은 수주 풍년 덕에 가능했다. 현대중공업의 지주회사인 한국조선해양은 올해 들어 31조4500억 원(184척)에 이르는 선박 주문을 받았다. 연간 목표를 26.5% 웃도는 수치이고,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초과 수주다. 올해 9월 현재 세계에서 발주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의 82%를 우리 업체들이 수주했을 정도로 한국의 조선업이 다시 살아났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LNG 운송용 선박 수요가 늘어난 데다 고부가가치 선박 제조 기술력에서 한국이 중국에 크게 앞서 있기 때문이다.

▷‘말뫼 스토리’는 눈물로 끝나지 않았다. 조선업 붕괴 후 절치부심한 말뫼시는 1998년 버려진 조선소 땅에 말뫼대를 세우고 벤처 창업을 지원했다. 친환경 도시를 목표로 470km의 자전거 길도 만들었다. 고급 인재와 함께 세계 최대 가구업체인 이케아 본사 등 유럽연합(EU)의 주요 기업이 몰리면서 말뫼는 지금 제2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군산이 조선소 재가동에서 멈추지 않고 말뫼처럼 국내외 청년들이 몰려드는 활력의 도시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