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움직이는 조각들

bindol 2022. 11. 14. 15:34

[이규태 코너] 움직이는 조각들

조선일보
입력 2003.01.29 19:48 | 수정 2003.01.30 14:30
 
 
 
 


본지에 연재 중인 서울 새명물로 움직이는 형상의 이색 조각들이 눈길을
끌고 있다. 서울 새문안 경희궁 앞에 높이 23m의 거인 조각이 2분 만에
한 번씩 망치질을 하고있어 답답한 도시인의 가슴 치기를 대행하고,
경복궁 옆 미술관거리에는 건물 지붕 위를 큰 보폭으로 탈출하는 여인
조각이 숨막히는 도시와 체제, 모럴에서 탈출하고 싶은 시민들의 원망을
대행하고 있다. 이 움직이는 조각들은 텔레비전·인터넷 등 영상만을
주로 접하고 살아온 신세대의 피그말리온 콤플렉스에 영합되어 주의를
끌게 한다. 실제 인간과 담을 쌓고 영상만을 접하다 보면 인형이나 조각
등 상상 속의 인간이 실제 인간보다 더 친근해지는 심리현상이다.
피그말리온은 상아로 여인상을 만들어 이를 죽도록 사랑하자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 조각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었다는 신화 속의 왕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소녀 인형에 프란시느란 이름을 지어주고 어찌나
사랑했던지 여행할 때 항상 가방 속에 넣고 데리고 다녔다. 언젠가
여행을 떠났다가 당일로 돌아왔는데 깜박 잊고 이 인형을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이탈리아 아페닌 산 중에 메디치가(家)의 산장이
있는데 그 뜰에 30m의 청동제 거인상이 있다. 내부장치가 되어 있어
소리내어 웃고 눈물 흘리는 등 희비애로(喜悲哀怒)를 하는 피그말리온
조각이다. 유럽에서 등신대의 비너스상은 잠들기 전에 단단히 묶어놓는
관행이 있었는데 묶어놓지 않으면 그 환영이 빠져나와 사나이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알았다. 이를 주제로 하여 메리메는 「이르의
비너스」라는 단편을 썼다. 주인공인 젊은이가 테니스를 하는 데 방해가
되어 약혼반지를 빼어 곁에 있던 비너스상의 손가락에 끼워놓았다.
운동을 마치고 그 반지를 빼어 가지려 하자 손가락이 굽어 빠지지가
않았다. 조각 비너스가 약혼자가 된 셈이다. 그후 첫날밤에 신부를
끌어안으려 하자 반지 낀 거대한 비너스가 나타나 배신자라면서 압살해
버린다.

우리 전통 냉방도구로 품고 자는 죽부인(竹夫人)이 있는데 오래 되어
체취가 스미면 밤중에 죽부인이 환영으로 빠져나와 주인을 유혹하는
바람에 잠꼬대로 본부인에게 들통난다는 이야기도 있다. 영상세대인
신세대의 피그말리온 콤플렉스를 대행하는 움직이는 조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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