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세뱃글

bindol 2022. 11. 14. 15:33

[이규태 코너] 세뱃글

조선일보
입력 2003.01.30 19:09
 
 
 
 


설 하면 세뱃돈을 연상하는데 그 뿌리는 깊지 않다. 설날에 액(厄)과
결별하는 민속이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로 제웅이라는 게 있었다. 짚으로
만든 인형에 액 곧 불행을 담아 섣달 그믐날 길바닥에 던져두는데
걸인이나 아이들로 하여금 주어가게 하고자 짚 인형 뱃속에 동전을 담아
던져둔다. 그렇게 해서 불행이 옮겨갈 수 있을 것으로 알았다. 아이들은
당장 돈욕심이 우선되기에 버려진 제웅을 줍지 못하도록 하고자 주기
시작한 것이 세뱃돈이라는 설도 있다. 옛날에 집안 어른이나 서당
훈장에게 세배 가면 세뱃돈 대신 벼루를 앞에 놓고 붓글씨를 써서 봉투에
넣어주었다. 집에 들고와 무릎 꿇고 펴보게 돼있었는데 한자 서너자가
씌어 있게 마련이었다. 외자면 일자훈(一字訓), 세 한자가 씌었으면
삼자훈(三字訓)이라 했는데 이를 세뱃글이라 했다. 그 아이가
고쳐나갔으면 하는 성향의 뜻글로, 그 세뱃글을 한 해 동안 머리맡에
붙여두고 조석으로 조심케 했던 것이다.

어릴 적 훈장한테 받았던 기억에 남는 삼자훈(三字訓)으로
「행중신(幸中辛)」이라는 게 있었다. 행(幸)자 속에는 맵고 쓰라릴
신(辛)자가 들어 있음을 적시해주는 교훈이다. 행복이란 반드시 쓰라린
역정을 겪어야 얻어지는 것이요, 좌절을 겪고 쓰라림을 극복했을 때
느끼는 경지라는 가르침이다. 소 우(牛)자 일자훈도 자주 써주던
세뱃글인데 심사숙고하지 못하고 작은 일에도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아이에게 곧잘 써주었던 세뱃글이다. 매사에 양은 냄비 물 끓듯 하면
낭패를 당하기 일쑤요, 오지그릇처럼 둔중하게 굴라는 가르침이다.

세뱃글은 상류 선비사회에서도 관행이 돼있었던 것 같다. 남명
조식(曺植) 선생이 즐겨 써주었다던 세뱃글은 칼에 눌리듯 마음을 신중히
하라는「인중도(忍中刀)」였다 한다. 남명은 날카로운 칼날을 곁에 두고
마음이 흐트러지려 하면 손가락으로 그 칼날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렸던 인중도(忍中刀)의 실천자로 남명학파의 행동철학이기도 했다.
중국 전 주석 장쩌민(江澤民)이 춘절, 곧 설마다 자신의 정치철학을
집약한 팔자결(八字訣)을 발표했던 것으로 미루어 세뱃글은 한문문화권의
시공(時空) 깊숙이 뿌리를 박은, 오늘에 되살리고 싶은 미풍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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