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사라지는 바나나조선일보

bindol 2022. 11. 14. 15:37

[이규태 코너] 사라지는 바나나

조선일보
입력 2003.01.26 19:49
 
 
 
 


축구 팬들은 바나나하면 휘어 골인하는 바나나킥을 연상하지만
필리핀에서는 소녀를 사랑한 요정의 손을 연상한다. 사람과 요정이
맺어질 수 없자 이별하면서 팔을 붙든 채 손이 떨어져 나갔고 이 손을
고이 묻었더니 손모양의 바나나가 열렸다 해서 지금도 바나나 하면
사랑을 고백하는 은어가 돼있다 한다. 힌두교도들은 결혼식하는 집 앞에
바나나 나무를 세워두는데 바나나처럼 아들 많이 낳기를 비는 기원
주술이다. 인도 상류사회에서는 여인 틈에 끼어 자는 것으로 냉방을 하고
여인에 대한 최대찬사가 '바나나 나무 같다'함인데 섭씨 40~50도의
인도에서 체온보다 낮은 것이 바나나 나무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기독교 신자들은 에덴에서 뱀이 바나나 나무 그늘에 숨어서
이브를 유혹했다하여 바나나를 지혜의 나무라 부른다. 바나나 나무의
근간(根幹)인 줄기를 불경에서 위경(僞莖) 곧 가짜 줄기라 하는데
목질(木質)이 아니라 초질(草質)인 데다 벗기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공(空)으로 돌아간다 해서 얻은 이름이다. 「대집경」이라는 불경에
인간의 육체적 존재란 물방울이나 물거품 그리고 파초(芭蕉), 곧 바나나
같은 것이라 했는데 바로 바나나의 위경에 인생을 빗댄 것이다. 또 고대
불교에서 파초는 자업자득(自業自得)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상징이었다.
왜냐하면 대나무에 꽃이 피면 이듬해에 죽고 노새가 새끼를 배면 낳지
못하고 죽듯이 파초가 열매를 맺으면 다음 해에 죽기 때문이다.

바나나에서 씨를 없앴다는 것은 인류가 섭리에 반역한 10대죄 가운데
하나로 언젠가 보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은 헨리 소로다. 산골
숲속에 가면 으름이라 하여 검은 씨가 담뿍 들어있는 야생 바나나를
지금도 볼 수 있듯이 바나나에는 원래 씨가 있었던 것이다. 노벨상수상
작가인 중국의 임어당(林語堂)은 피부가 노오란 황색인종이면서 행동이나
사고(思考)를 백인처럼 하는 얼간이를 겉은 노랗고 속이 흰 바나나라
했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바나나 천지라 해도 대과가 없겠다. 그 바나나가
10년 후에는 각종 세균의 협공을 감당해낼 수 없어 사라진다고 영국
BBC가 일전에 방송했다. 소로의 예언대로 섭리의 보복이 시작된 것이다.
기왕 사라질 테면 인간 바나나들도 동반 징발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