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대 금혼 解禁
스크랜턴 부인이 이화학당을 차린 지 1년 만에 처음으로 찾아든 학생은
기혼녀였다. 가마 타고 하인을 거느린 김 부인은 당시 고관의 소실로
영어를 배워 명성황후의 통역이 되어 권부에 접근하고 싶은 야심만만한
맹렬 여성이었다. 그 반년 후 한 가난한 어머니가 먹고 입힐 수 없어
버릴 곳 찾아 학당의 문을 찾아들어 맡긴 아이가 둘째 학생이요, 당시
호열자가 만연해 수구문 밖에 버려 죽어가고 있던 아이 중 스크랜턴
부인이 주워 기른 아이가 세 번째 학생이다. 이름도 없어 부인은 들어온
순서대로 퍼스트, 세컨드, 서드로 불렀다. 스크랜턴 부인에게 희망을
주었던 이화 최초의 학생은 기혼녀였다.
초기 학당에서는 결혼하지 못하게 하지도 또 결혼했다 해서 다니지
못하게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1908년까지는 15세 전후만 되면
선생님들이 신랑을 물색, 짝지어 주어야 했고 스크랜턴 부인이 직접 함을
받기도 했으며 신부의 연지곤지 단장까지 학당에서 맡았다. 학교체제가
정비되면서 성행하는 조혼(早婚)이 학교나 학사운영을 흔들고 기독교의
순결정신도 작용하여 결혼한 학생의 입학이나 학생결혼을 만류했을 뿐
금지는 하지 않았다.
1896년에도 소신있는 한 기혼 부인이 학당의 문을 두드렸다. 열살 안팎의
소녀들만을 위한 학교요 교실이 비좁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던 것
같다. 물러서지 않고 간곡히 부탁하면서 하인이 들고 있던 불꺼진
호롱등을 들어보이며 「우리나라는 이처럼 불꺼진 등잔입니다.
어머니들이 알아야 자녀들을 가르칠 게 아닙니까」하고 버티었다. 이에
감동해 기혼여성을 학생으로 받아들였으며, 이 열정적인 여성이 한국여성
처음으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모교에서 후진을 가르친
여성지도자 하란사(河蘭史) 여사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혼여성들이 학당을 많이 찾았으며 1908년에는
25명의 기혼여성을 입학시켰다. 이들 남편들은 거의가 외국유학 중의
상류계급으로 사회활동의 꿈을 품은 여성들이었다. 이렇게 견제해오다가
광복 후 1946년 이화대학교로 발족하면서 교칙에 금혼조항을
명문화시켰던 것이다. 그동안 이 조항이 기본권 침해니 시대착오니 말이
있어오다가 엊그제 관계조항을 개정, 기혼자도 수학할 수 있게 됨으로써
곡절 많았던 이화 이면사의 한 장을 접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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