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하늘 밖을 걸어감에 그림자한테도 부끄러움 없었네
(獨行天外影無慙·독행천외영무참)
어지러웠던 세상살이 옛일 되었고(塵世紛紛成古今·진세분분성고금)/ 이웅·두밀과 이름 나란히 했으니 나 역시 드문 사람이라네.(齊名李杜亦奇男·제명이두역기남)/ 갓 비뚤어진 사람 보면 내가 더러워질까 서둘러 떠났고(其冠浼我望望去·기관매아망망거)/ 사람을 만났을 땐 일삼는 것 뚜렷하게 말했네.(所事逢人歷歷談·소사봉인력력담)/ 한 번 바다 속에 누워 정신을 스스로 지켰고(一臥海中神自守·일와해중신자수)/ 혼자 하늘 밖을 걸어감에 그림자한테도 부끄러움이 없었네.(獨行天外影無慙·독행천외영무참)/ 가의는 울었지만 난 웃을 수 있으니(賈生能哭吾能笑·가생능곡오능소)/ 둘이 함께 33년을 누렸구나.(俱享行年三十三·구향행년삼십삼)
16세기 선비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의 시 ‘自挽’(자만·스스로 쓰는 만시)으로 그의 문집 ‘소재집(蘇齋集)’에 있다. 노수신이 자신을 위해 쓴 만시로, 유배지에서 죽을 수 있는 상황이어서 미리 쓴 것일지 모른다. 그는 28세인 1543년 식년문과에 장원을 한 인재였다.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진도로 유배돼 1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위 시는 노수신이 33세 때 쓴 것으로 보인다. 7, 8행에서 가의(賈誼)와 함께 둘이 33년을 누렸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가의는 중국 전한시대 문사로 글을 잘했지만 모함을 받아 좌천된 후 33세에 죽었다.
둘째 행의 이웅과 두밀은 중국 후한 시대 문사로, 내시들에게 탄압받았지만 끝내 굴하지 않았다. 노수신은 이들의 이름을 빌려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노수신은 성격이 바르고 강직했다. 상대방 갓이 비뚤어진 것만 봐도 ‘저 사람은 바르지 않다’며 자리를 떴다. 누구를 만나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所事逢人歷歷談). ‘한 번 바다 속에 누워 정신을 스스로 지켰고’라는 말은 진도라는 섬에 유배됐지만 소신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시인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혼자 하늘 밖을 걸어감에 그림자한테도 부끄러움이 없었네’다. 그만큼 자신은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왔다고 했다. 우리는 정말 ‘그림자한테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날씨가 추워지지만 햇살이 너무 맑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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