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오프사이드
서울 월드컵 개막식에서 독일작가 귄터 그라스가 「오프사이드」라는
축시를 낭독했다. 「고독하게 시인은 골대앞에 서 있었고/심판은 호각을
불었다/오프사이드!」 이 시에서는 시인의 고독을 유예시키는
오프사이드다. 수비 없는 적진에 공을 몰고 들면 골에 직결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승부가 빨리 나고,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의
흥미가 반감된다. 그렇게 빨리 승패를 가르지 말고 보다 실력을 겨루어
성취하도록 제동하는 것이 오프사이드다. 경기장을 떠난 오프사이드는
대기(大器)를 위한 유예(猶豫)요 만성(晩成)이라는 교훈이다. 이렇게
「오프사이드」로 시작된 한국축구가 4강에서 돌풍을 재운 것은 도약을
위한 유예요, 만성을 위한 오프사이드랄 수 있다.
개화기 길거리에서 「이상한 대나무컵」을 팔았다는 외국인 기록을
보았다. 이 컵에 물을 부어 8푼쯤 차면 밑이 절로 빠져 쏟아져
버리는지라 미국인에게 이상한 컵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에게는 의기( 器)라 하여 이를 머리맡에 놓아두고 일상적으로
과욕을 억제하고 분을 넘치지 않게 하는 감시자였다. 달이 차면 기울고
곳간이 차면 자식농사 망친다. 배가 고파도 8푼 이상 채우지 말고, 하고
싶은 말도 다하지 말고 2푼은 남기라 했다. 이처럼 조상들은
팔푼주의자(八分主義者)였다. 부자도 8000섬에 이르면 늘리기를 멎고
8000섬이면 만석꾼으로 불러주는 것이 관례였다. 머슴 고를 때 낫을 갈려
보고 그 성품과 장래를 가늠하여 쓰고 안 쓰고 했다. 칼날을 세우면
다급하여 장래가 없는 것으로 보고 8푼만 세우면 여유와 장래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민화소설 「사람은 얼마나 땅이 필요한가」에서 주인공은
걸어간 만큼 땅을 주되 해지기 전까지 출발점에 돌아오지 못하면
허사라는 조건으로 걸어나섰다. 한걸음 한걸음 땅욕심으로 걸어나가다가
기우는 해에 쫓겨 달려오는 바람에 지쳐 죽는다는 줄거리다.
불교설화에도 100마리의 소를 채우려던 부자가 채우고 나면 150마리
200마리로 욕심이 커나가는 바람에 패망하고 마는 이야기가 있다.
돌풍을 일으켜 승승장구해온 한국축구에 하느님이 오프사이드를 걸어
4강에 멎게 했다. 더 큰 발전과 희망과 기대를 수용할 2푼을 벌어주려는
배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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