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왕관의 무게

bindol 2022. 11. 23. 06:04

[이규태 코너] 왕관의 무게

조선일보
입력 2002.06.04 20:09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대관식 때 썼던 왕관은 17세기에 찰스2세가 썼던
것으로 그 무게가 적잖이 2.5㎏이나 되었다. 그래서 국회 개원식에
나가는 등 왕관을 써야 할 때에는 그보다 조금 가벼운 빅토리아 여왕의
왕관을 썼다. 한데 이 왕관은 루비·에메랄드·사파이어를 비롯해
다이아몬드만 2783개로 수놓은 호화찬란한 것으로 이 역시 엘리자베스
여왕이 쓰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전세계의 땅 4분의 1을 식민지로
거느렸던 빅토리아 시대와 그 모두를 잃고 있는 엘리자베스 시대를
비유하는 척도로 이 왕관의 무게가 곧잘 거론돼왔다. 지금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 등극 50주년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 검소하고
조촐함이 사치스럽고 호화스럽던 빅토리아 여왕의 등극 60주년 행사와
비교되어 왕관의 무게가 여론의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 잔치 때에는 전세계 80여 국가에서 축하사절이 왔으며
여왕의 황금마차는 50여개국 식민지 병사들이 호위를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을 특명전권대사로 보내어 여왕의
「수록무강(壽祿無彊)과 영향강녕(永享康寧)을 빈다」는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하례에 참여했었다. 충정공의 기록에 보면 후제(后帝) 곧
여왕이 황금마차 타고 궁을 나와 예식이 베풀어지는 성당에 가는 길목에
층층으로 단을 쌓고 모인 인파가 천만을 웃돌았으며 서양 만세인 우라(
羅) 소리가 진동하기를 천지가 좁은 것 같았다 했다.

지금은 왕족만이 참여하는 콘서트와 예배, 그리고 퍼레이드·횃불놀이가
고작인데 잔치 진행 중에 버킹엄궁전에서는 설상가상으로 불까지 났다.
대관식 때만 해도 20세기 최대의 호화쇼로 세상이 들썩거렸던 것과도
대조가 된다. 영국 국민의 왕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데다 왕실이
돈쓰는 것에 민감한 것을 여왕은 의식했음직하다. 영국 왕실의
전통오락인 여우사냥마저도 환경단체에 의해 저지 당하고 있으며,
다이애나 세자빈의 추모열을 반(反)왕실 무드로 파악하는 시각마저도
있다. 대영제국의 무거운 왕관을 쓰기에는 나약하고 대영제국의 찬란한
왕관을 쓰기에는 초라해져 있는 여왕이다. 영국에서는 그래서 안타까운
무드를 앞다투어 신문들이 전하고 있지만 그런 검소·겸허한 여왕에게
호감이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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