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축국(蹴鞠)
세계적인 축구잔치인 월드컵을 주최하면서 우리 삼국시대의 축구인
축국(蹴鞠)을 재연하여 우리 스포츠 문화의 위상을 만방에 알렸으면
한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전(東夷傳)에 고구려 풍속으로 축국을 잘
하고 즐긴다 했고 한국문헌에 축국이 처음 나오는 것은 「삼국유사」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정월 오일(午日)에 김유신의 집 앞마당에서 축국을
하고 놀았는데 유신이 춘추의 옷자락을 밟아 옷깃이 해어졌으며 이를
집에 들고 들어가 누이동생 문희(文姬)에게 꿰매라 시켰다. 이것이 연이
되어 오가더니 문희가 아이를 배게 되었고 김유신이 그 사실을 알고
불륜을 저지른 문희를 분살(焚殺)시키려 들었다. 때마침 남산에 유람
나갔던 선덕왕이 무슨 연기인가 알아보고 아이를 배게 한 사나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곁에 있던 김춘추가 안절부절못하자 임금은 눈치채고
분살을 멈추게 하고 김춘추와 혼례를 올리도록 했다. 신라통일의 원인이
됐으니 축국은 한국사에서 위대한 등장을 한 셈이다. 그 후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축국은 찾아볼 수 없는데 조선 효종 때 김육(金堉)이
편찬한 「유원총보(類苑叢 )」에 축국은 우리나라에서 한식 때 즐겼고
일명 백타(白打)라고도 한다 했으니 여염에서는 계승해 놀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신화시대에 황제(黃帝)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남방신
치우(蚩尤)와 싸워 이겼을 때 치우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차기 시작한
것이 축국의 시작이라고 「형초세시기」는 적고 있고, 전국시대에는
양병(養兵)의 무련(武練)수단으로, 한(漢)나라 때는 병법(兵法)으로
정착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
보타진사(步打進士)라는 말이 나오는데 당나라 때 축국으로 무반(武班)의
과거를 쳐 진사벼슬을 주었음을 고증하고 있다. 중국 고대문헌
「축국도보(蹴鞠圖譜)」에 의하면 채단으로 장식한 구문(毬門)을 세우고
좌군 우군으로 편을 가르는데 키퍼는 수망(守網), 센터 포워드는
정축(正蹴), 윙은 출첨(出尖), 풀백은 정협(正挾)이라 했으며 헤딩을
앙두괴(仰頭拐), 바나나킥을 원광괴(圓光拐)라 한다 했으니 운행이
지금과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선수들 옷의 색상이나, 춤과 노래로 엮인
식전행사도 문헌에 나오기에 재생시키는 데 힘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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