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귄터 그라스

bindol 2022. 11. 23. 06:12

[이규태 코너] 귄터 그라스

 

조선일보
입력 2002.05.29 19:55
 
 
 
 


한국인을 이해하는 패러다임으로 미생원(未生怨)을 들수 있다.
태어나기 전에 부모나 조상이 저지른 원한이 살아있는 나에게 미친다는
숙명론이다. 그리하여 시집간 딸이 사위에게 얻어맞고 와서 통곡을 해도
어머니는 그것이 전생에 조상이 저지른 인과로 돌리고 손자놈 벌에 쏘여
얼굴이 부어 들어와도 전생 탓으로 돌려 마음을 편하게 가지곤 했던
것이다.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의 대표작 「양철
북」은 바로 이 독일 미생원을 주제로 했다해도 대과가 없다. 주인공
오스칼 소년의 미생원은 이미 외할머니로부터 시작된다. 경찰에 쫓긴
방화범을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가 치마속으로 숨겨준 것이 아이를
배게하여 어머니 애그네스의 출생으로 이어진다. 애그네스는 오스카를
낳은 후에도 외간 남자와 밀회, 언젠가 오스카는 이 정부의 손이
어머니의 사타구니속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을 숨어서 본다. 오스칼은
불의의 애를 밴 어머니를 투신하여 죽음에 이르게한 아버지를 증오, 그
원한으로 새어머니 마리아와 변태적인 사랑에 빠진다. 2차대전후 소련
군인이 오스카의 집을 수색했을 때 오스카는 아버지의 나치스
당장(黨章)을 꺼내보여 현장에서 사살케한다. 이 연속되는 미생원으로
오스칼은 더 이상 자라고 싶지않아 양철북 치며 지하 창고로 추락,
성장을 멎게 된다. 이렇게 부모를 죽게한 오스칼의 미생원이 풀리자
성장이 재개되었는데, 그 중단 시기가 나치스 집권시기에 맞먹었다는
것은 시사한 바가 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한심할 때마다 성장을 멎고
쿵쿵 치고 다녔으면 싶게했던 양철북이다.

그 양철북의 귄터 그라스가 엊그제 한국에 와 월드컵 개막식에서
헌시(獻詩)를 낭독한다. 빈민 출신으로 2차대전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으며 갱부 석공 등 노동판에서 일했고 베트남 반전, 핵기지
반대, 자본주의 주도의 독일 통일반대 등 좌파 지식인으로서 젊은
작가들의 정치의식 부족을 나무라온 행동파다. 그가 한국에 와 맨 먼저
판문점을 찾았고 문학보다 통일이라는 정치문제에 관심을 더 가지려한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다만 북한이 그의 방북을 거부하고 관심을
보이지않은데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