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코르셋 역사속으로
야사에 보면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강화조건 가운데 하나로 유방이 큰
대유녀(大乳女) 3000명을 차출, 청 태조의 고향인 영고탑(寧古塔)에
이주시키라는 것이 있었다. 인구를 번창시키려는 방편일것이요 유방이
클수록 생산력이 강하다는 생각은 동서가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대 희랍 로마의 아가씨들은 유방을 크게 보이고자 끈을 유방 아래로
돌려 쳐받치게 해서 등뒤에서 맺었다. 이 끈은 첫날 밤 신랑이 끊게끔 돼
있었다. 이 유방 키우는 끈이 후에 유방을 추켜 올리는 「부스크」가
되고 이것이 코르셋의 뿌리가 된다.
로마가 망하고 그리스도 시대가 되면서 유방은 가급적 사람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금욕문화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영어에
유방이라는 말이 없다. 브레스트(breast) 버섬(bosom) 버스트(bust)로
유방을 나타내는데 가슴 전체를 뜻하며 유방은 그 속의 한 부위일
뿐이다. 이 금욕문화의 여파로 코르셋이 등장했다. 영국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에 가면 16세기 초의 철제 코르셋이 두 벌 전시돼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완벽한 고문 기구라 해도 대과없을 그 속에 상반신을 조이고
살아야 했던 중세 여인들이었다.
18세기에 들어 코르셋의 소재가 베로 완화됐지만 서너 살 때부터 입히는
것이 관례라, 유럽의 남성들은 배로 숨을 쉬는데 여성들은 가슴으로 숨을
쉰다 할만큼 생리변화와 내장 위치 변화가 학계에 보고되기까지 하여
비인도·비인권의 극치로 지탄받아왔다.
우리나라에도 가슴조이는 압박의 역사가 없지 않았다. 양귀비가 어느
장군과 외도를 하면서 유방에 멍이 들었다. 임금 앞에 나가게 되자 그
멍을 숨기고자 붉은 천으로 유방을 가리고 나간 것이 중국 코르셋이랄
유대(乳帶)의 시초요 그것이 한국의 치마말기의 본이라는 설이 있다.
개화기 때 이화학당 기숙사에서 상급생들이 하급생의 유방을 감아
양쪽에서 발을 버티고 졸여대는 젖졸임 풍속으로 비명소리가 기숙사
밖으로 들려나왔다 했으니 우리나라에도 유방을 적게 보이려는 문화가
없지 않았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인기를 누렸던 인체 압박의 전근대적 유물인 코르셋이
업체에서 생산을 중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보도가 있어 그 육체
압박사를 간추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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