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한국의 다리
외세의 침입이 잦아서인지 한국의 유희(遊 )는 외적을 막는 민간의
자위수단과 맥락해서 발달했다. 강강술래가 이순신 장군의 세과시를 위한
위장 작전에서 비롯됐다듯이 놋다리 밟기는 도강(渡江)작전을 유희화 한
것이다. 차례로 등을 끼고 엎드려 등 다리를 만들고 그 다리 위를
피난하는 노인이나 존장 귀인으로 하여금 건너게 하는 인간다리 놀이인
것이다. 그러했을 만큼 크고 작은 냇물에 다리가 없었다. 고구려의
평양대교(413), 백제의 웅진교(498), 비형랑이 귀신들을 이끌고 놓았다는
귀교(鬼橋·596), 경주 문천(蚊川)의 일정교·월정교 등 다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영구성의 돌다리는 무지개 다리나 수표교처럼 장식이나
상징적 뜻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을 때 놓았을 뿐 가장 길다는 것이
뚝섬의 살곶이 다리가 고작이었다. 그리하여
징검다리·외나무다리·통나무다리·흙다리·잔디다리·판자다리·흔들다리
등 장마에 쓰러져 나가면 다시 세우는
임시성의 다리가 대부분이었다.
능참배 등 임금님의 도강 때는 한강을 오르내리는 모든 배들을 강제
징발, 엮어서 배다리를 놓고 건넜다. 배다리로 한강의 교역이 중단되고
손님이 끊어진 오강 나루의 주모(酒母)들 머리 잘라 판다는
주교원가(舟橋怨歌)가 있을 지경이었다. 청일전쟁에 패배한 청나라
장수가 패인으로서 「말이 끄는 야포하나 나르는 데도 주저앉고 마는
허약한 한국의 다리」를 들었고 일본 장수도 「조선다리는
있으나마나하여 얕은 상류까지 도는 바람에 작전이 늦었다」고 했다.
통감정치 때 육군대장이었던 데라우치는 무력 통치의 필수 조건으로 일본
야포 2문이 동시에 통과할 수 있는 넓이와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다리
놓기로 시정의 첫발을 디뎠다.
이렇게 다리를 놓지 않았던 것은 미개해서가 아니라 외침에 시달린
약소국가의 슬프디 슬픈 사관(史觀) 때문이었다. 일본 침략에 항의, 음독
자살한 학자 이병선(李秉璿)의 유서에서 그 사관을 보아본다. 「만약
조선의 길이 넓고 다리가 단단했던들 조선 역사는 잦은 외침에 찢겨 아예
남아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월드컵 앞두고 한강 다리들이 휘황찬란한
오색 조명으로 부각되고 있는데 한국의 다리가 1만7150개로 총연장
1315㎞에 이른다는 발표가 있어 슬프디 슬픈 다리 사관을 되뇌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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