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새문안 대궐
경희궁(慶熙宮)의 중심부기 복원되어 오늘 공개된다. 새문 안에 있기에
새문안 대궐이라고도 하는데 그 새문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한양 사대문 가운데 하나인 서대문은 태종 때까지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여 경희궁 안쪽 옛 서울고등학교 본관 서편에 있었던 것을 보다
남쪽으로 옮겨 돈의문(敦義門)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하여 이 돈의문을
새로 지었다 하여 새문(新門)이라 불렀고, 서전문도 틀어막았다 해서
새문(塞門)이라 불렀다. 그래서 서대문 안을 새문안이라 불러왔는데
한문표기를 하면서 신문로(新門路)라는 지명이 생겨나 지금도 그렇게
쓰이고 있지만 문헌에 보면 새문동(塞門洞)·경희궁도
새문동궁(塞門洞宮)으로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새문(塞門)쪽이 맞는 것
같다.
왜 서전문을 막고 새 대문을 지었는가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내렸다.
그 대문 곁에 태종의 공신인 세도가 한분이 살고 있었는데 대문을 통해
드나드는 나무꾼들의 달구지 끄는 소음이 시끄럽다 해서 문을
틀어막았다는 것이다. 이 세도가의 집이 꽤나 넓었던지 후세에 광해군의
아우요 인조의 아버님이 되는 정원군(定元君·元宗)이 살았다.
「조야첨재」라는 문헌에 보면 이 정원군이 사는 터에서 임금이 날
풍수라는 소문을 듣고 그 풍수의 지맥을 끊고자 광해군이 이곳을 넓혀
대궐을 지은 것이라 했다. 광해군은 인가 수천 채를 헐어 둘레를
1100보나 되게 넓혔으며 나무를 남벌하여 뗏목이 강을 메웠다 했다.
부역이 혹심하여 민력이 고갈하고 공사에 필요한 물자를 바친 자에게는
정삼품 당상 벼슬을 남발했기로 산채(山菜)판서·산삼(山蔘)정승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하지만 풍수는 막지 못하고 정원군의 아들인
인조(仁祖)가 반정(反正)으로 광해군을 몰아냈다.
처음에 이 새문안 대궐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던 것을 영조 때
장릉(章陵) 곧 인조의 아버님인 원종의 시호(諡 )와 같다 하여 이를 피해
경희궁으로 바꾼 것이다. 일제 때 왕궁을 해체하거나 민중의 눈으로부터
가리는 정책에 따라 경희궁도 숭정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흥화문은 장충단으로, 광선문은 일본절로, 황학정은 사직단 뒤로
찢어발겨 일본인 중학교를 세웠는데 해체 90여년 만에 그 중심부를 복원,
오늘 공개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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