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밥퍼’ 운동
노숙자 노인 걸인 등 소외받은 사람들에게 밥을 나누어주는 청량리
역전의 밥퍼운동에 외국인 교수를 비롯, 국적을 초월한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어 사회의 아랫목 같은
훈김을 느끼게 한다. 이 아랫목은 옛날에도 없지 않았다. 주로 한양
사대문 사소문 앞이 노숙자의 잠자리인데 그 중 동대문과 남대문 앞은
일거리 찾아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수백명을 헤아렸다. 북촌
양반들이나 황토마루의 중인들 가문에서는 이 성문 앞을 찾아다니며
노숙자들에게 밥 보시를 했다. 밥솥과 국솥을 숯불로 덥히게끔 된
밥수레를 끌고 와 「개천(청계천)변 천녕(川寧)현씨(玄氏) 밥보시요!」
「교사동 김참판댁 밥보시요!」 하며 밥을 퍼주었다. 더러는 빈대떡을
부쳐와 「떡 보시요!」를 외치며 던져주기도 했다. 이것은 전통사회의
도시형 밥퍼요 시골에도 나름대로의 밥퍼문화가 발달했었다.
산채서리가 그것이다. 여럿이 떼지어 주인 몰래 훔쳐 먹는 행위를
서리라고 하는데, 신채 서리는 주인의 묵인하에 이루어지는 선의의
약탈행위다. 보릿고개 맞아 먹을 것이 떨어진 산촌에서는 아낙네들끼리
떼지어 산에 가 산채를 뜯어 한 광주리씩 머리에 이고 인근 마을의 좀
산다는 집을 찾아든다. 멍석 하나 뒤란에 펴놓고 뜯어간 산채를
쌓아놓는다. 요구한 상품이 아니기에 강매 행위이지만 마님은 싫다
마다않고 쌀을 넉넉히 퍼다가 밥을 한솥 짓는다. 실컷 퍼 먹이고 또
식구를 위해 나누어 싸가도록 한다. 약탈 형식으로 진행되었던 전통 밥퍼
관행이었다.
좀 먹고 살 수 있는 집들에서는 마님이 끼니 양식을 낼 때 식구 먹을
정량에다 세 사람 먹을 수 있는 분량을 덤으로 더 퍼주는 관행도 있었다.
이를 「석덤」이라 했다. 이렇게 해서 남은 밥은 양식이 떨어져 끼니를
거르는 집으로 흘러가거나 뜨내기 소금장수 젓갈장수가 들르면 주고,
각설이 패나 동냥하는 스님에게 돌아갔다. 이 같은 서리나 석덤의 혜택을
입은 사람은 변제의 의무가 없으나 대사가 있을 때 품으로 은공을 갚았던
것이다. 전통 한국 농촌에서 논밭 한뙈기 없는 가구 비율이 70%가
넘었는데도 각박하지 않게 정답게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밥퍼 문화가
발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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