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베이징 외국공관

bindol 2022. 11. 26. 08:23

[이규태 코너] 베이징 외국공관

조선일보
입력 2002.04.29 20:00
 
 
 
 


정치범이나 과실범인이 복수나 관헌의 추적을 피해 특정 지역에 들어가면
더 이상 추적하지 못하는 특구(特區)는 구약성서에도 여섯 차례나
나온다. 이를 아지르라 했는데 독일에는 18세기까지 이 도망자
보호특구가 있었다. 유럽에 산재해 있던 아지르들은 공법(公法)이
정착하면서 사라졌는데 이웃나라와 교역하는 시장특구로 탈바꿈해서
발달했다. 삼한시대의 마한에도 별읍(別邑)이라는 아지르가 있었다.
50여개 나라들이 이웃하고 있었는데 그 경계 부근에 솟대(蘇塗)라는
기다란 장대를 세우고 북과 방울을 달아 별읍 지역을 표시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쫓기는 도망자가 이 별읍에 들면 더 이상 추적하지 못했다고
'삼국지(三國志)' 마한전에 적혀 있다. 솟대는 동북 아시아 민족들에게
널리 번져있던 천신(天神)과의 교감 안테나로 지금도 장대에 나무 새
한마리 앉혀놓은 형태로 우리나라에 남아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교수형 직전의 집시 미녀
에스메랄다를 종지기인 꼽추 카지모도가 납치 아지르인 노트르담 사원에
보호한다. 이처럼 아지르는 사원, 사찰 그리고 물방앗간, 대장간,
야외제단, 고목 아래 등에 잡았다. 제주도 토산 바닷가에 삼만으리소라는
샘터가 있다. 관가의 포졸들이 쫓던 죄인이 이 소에 숨으면 쫓지 못하고
칼을 꽂고 돌아갔으며 한말 이재수의 난에 토산 사람들이 피해를 적게
입은 것은 바로 이 아지르 때문이라는 말도 들었다. 부산 용두산 아래
일본 사신이 상주했던 왜관이 특정 물물을 교환하는 경제특구 구실을
했고 복수를 피하거나 폭행을 피해 더러 왜관에 잠입하기도 했다 한다.

고대에 이처럼 인권을 감정이나 법으로부터 보호하는 제도가 있었다면
현대에도 그런 기능이 살아있어야 한다. 지금 중국에 있는 탈북 동포들
가운데 베이징 외국공관으로의 아지르행이 잇따르고 있다. 물론 불법화된
상태에서 정신만을 살려 엊그제도 베이징 미국대사관으로 탈출한 탈북자
2명이 서울에 도착했다. 외국을 돌아돌아 우회할 것 없이 마한의
별읍처럼 남북 경계에 특구 하나 만들어 솟대 하나 세워놓고
경제·스포츠·문화·학술·관광 교류를 하고, 더불어 이산가족 만나고
탈북·월북하고자 하는 사람 보호받는 인도(人道)특구를 만들어 남북
간의 숨통을 틔워나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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