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논
한말 헌종(憲宗) 때 항간에 다음과 같은 동요가 번졌었다.
「당당홍의(堂堂紅衣) 정초립(鄭草笠)이 /계수나무 능장 짚고
/건양재(建陽峙)로 넘나든다 /반달이냐 왼달이냐 /네가 무슨 반달이냐
/초생달이 반달이지.」 헌종이 반월이라는 미색에 혹하여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건양재에 주막을 지어 반월을 살림차려 주고
사복으로 드나들며 국사를 소홀히 한 데 대한 반감의 동요인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한 수단으로 그릇돼가는 나랏일에
여론이 결집되면 이같은 동요를 방방곡곡에 흘려 공감대를 형성시켰던
것이다. 이 동요가 백성들에게 널리 깊게 파고들게 하고자 「아나 농부야
말들어 /서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남았네 /네가 무슨 반달이냐
/초생달이 반달이지」 하는 농부가로 정착된 것이다. 곧 나랏일을 소홀히
하고 사욕에 빠지는 것을 서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줄어드는, 농부로
하여금 생사 존폐의 위기와 직결시키고 있음을 본다.
지금은 미색인 반월 때문이 아니라 이농과 우루과이 라운드에 의한
쌀시장 개방이 맞물려 한 해에 여의도 100배의 논이 사라져왔으며,
2004년의 쌀 개방 재협상을 계기로 당국은 2005년까지 논을 12%나
줄이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래서 네가 무슨 반달이냐고 노래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있어 선사시대 이래의 대변혁이며,
이에 따른 직·간접의 다양한 변화에 대한 충격완화 장치를 미리미리
마련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논의 연간 쌀 생산으로 인한 직접가치 창출이 10조원이라는데
논의 홍수 예방, 지하수 보존, 맑은 물 정화, 토양유실 방지, 맑은 공기
정화, 여름의 공기냉각 등 간접가치 창출은 20조원으로 계산되고 있다.
파랗고 누런 풍경에서 오는 정서 상실과 생태계의 교란에서 오는 향수
상실을 보태면 논은 한국인에게 공기 다음으로 소중하다. 어릴적 대소변
가릴 나이만 되면 「내 논」이라 하여 논 한쪽 구석을 떼 주었다. 그 내
논에서 물 대고 못자리하고 모심고 피사리하고, 한벌김 두벌김 세벌김
매며 새를 보고 벼를 베는 모든 일을 견습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한국인은 논일로 인내와 끈기를 익혀 그 험한 보릿고개며 기근과 병란을
살아냈던 것이다. 논에서 체질화된 이 근로상실까지 감안하면 논 줄이는
일은 그야말로 N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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