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서울의 지붕위

bindol 2022. 11. 26. 08:41

[이규태 코너] 서울의 지붕위

조선일보
입력 2002.04.18 19:05
 
 
 
 


미국 장병이나 상사원들은 한국 근무를 위한 사전 교육에서 「한국인의
예스(yes)는 노(no)일 경우가 많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 한다. 이
아리송한 철학적인 말을 이해하는 데 많은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인 존이 한국인 갑순이와 데이트를 하면서 배가 고프냐고
물었다 하자. 요즈음 갑순이들은 조금 달라졌다고 하지만 서먹서먹한
사이일 때일수록 배가 고프면서도 고프지 않다고 대꾸하는 것이
한국인이다. 곧 예스 할 것을 노라고 대꾸한다. 이처럼 체면과 본심과의
괴리가 혹심한 한국인이다. 해외 관광지에서 한국인의 명품 구입률이
높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며 명품을 몸에 지니기를 좋아하는 것도
본질적인 자신과 나타나는 자신과의 표리부동이요 표리 괴리를 말해주는
것이 된다. 표리부동이나 괴리가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시카고대학의 경제학자 게일리 베커 교수는 모든 인간은 범죄를 저지를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이득(베너피트)보다
비용(코스트)이 많이 들기 때문이라는 경제원리를 적용해 유명하다.
예전보다 현대에 범죄가 많은 것은 신앙 이탈로 양심가책이라는 코스트가
적게 든 때문이요, 서양보다 동양사람에게 범죄가 적은 것은
동양사람들의 체면손상이라는 코스트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했다.

집을 꾸미는 것도 손님을 접대하는 사랑방에 집중됐었다.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갖추고 완자무늬 창살의 조명창을 드리며 타지도
않는 거문도를 벽에 걸어 놓곤했다. 이 속(裏) 문화에서 괴리된 겉(表)
문화가 현대 가옥의 응접실에 고스란히 재생되었었다. 손님 맞는
응접실에는 서가에 외국 백과사전이 꽂혀있고, 치고 치지 않고와는
아랑곳 없이 피아노가 놓여 있다. 며느리 고를 때 그 집 뒤란을 돌아보고
고르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속선 본다」했다. 뒤란이 지저분하면
표리부동의 가풍이 그로써 드러나고 그런 가풍에서 자란 규수는 한풀
꺾이고 들었던 것이다. 한데 고층화가 진행되면서 표리부동이 뒤란에서
지붕으로 옮아가 한국인의 치부를 노출시키고 있다. 국제적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호텔방에서 내려다보이는 이 치부가 문제됐었는데 월드컵을
앞두고 또다시 부각되고 있다. 큰 일 당해서 허겁지겁할 게 아니라 진작
옥상 녹화나 휴식공간화를 의무화하는 등의 옥상 공간 문화가 정착됐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