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책

bindol 2022. 11. 26. 08:37

[이규태 코너] 책

조선일보
입력 2002.04.22 19:15
 
 
 
 


천자문(千字文) 배울 나이가 되면 아버지는 글동냥(乞筆)의 기나긴
여로를 떠난다. 대과(大科)는 못되더라도 향시(鄕試)를 거친 진사 생원을
찾아다니며 넉자씩으로 된 천자문 다섯줄씩을 친필로 써달라고 동냥하며
50여 집을 찾아 헤맸으니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글을 써준
선비는 이 아이의 글 아버지가 되어 서양의 대부(代父)처럼 평생 인연을
갖는다. 책 한 권 되기가 그만큼 어렵고 정성과 정신이 들어가 있으며,
아무리 자질이 못된 아이일망정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서(古書)를 접하다보면 책장 넘기는 모서리가 종잇발이 서고 닳아 새
종이로 이어놓은 것을 이따금 볼 수 있다. 이를 보장(補帳)이라 하는데
맨 끝장에 보장기라 해서 그 닳아 없어진 책 모서리 만든 사람의 본관
성명과 보장한 해의 간지(干支)를 적고 있음을 보고 숙연했던 기억도
있다.

세조 때 학자 김수온(金守溫)은 걷거나 말을 타거나 측간에 들 때 소매
속에 책장을 찢어넣고 다니며 꺼내어 외웠다. 언젠가 신숙주(申叔舟)에게
세조가 내린 「고문선(古文選)」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그 귀한
책을 빌려왔다. 돌려준다는 날이 훨씬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어 남산밑
마르내가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건기침을 해도 소식이 없기에
방문을 열어 보았더니 온 방안 천장과 벽에「고문선」을 찢어 발라놓고
누워서 발을 괴고 까닥거리며 외우고 있었다. 옛날 책을 둔 풍습으로
억서(憶書)라는 게 있었는데 책을 다 외우고서 그것을 한 자도 틀림없이
필서로 재생시킨 책이다. 조상들은 그토록 책을 아끼고 깊이 읽었다.

지금 「직지심경」의 활자시대 개막 이래 600여년 만의 대단절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오늘 책의 날을 맞는다. 컴퓨터 안터넷 등
영상문화가 무섭게 활자문화영역을 점령해들고 있기 때문이다. 활자
모양의 네모바른 학사모를 쓴 활자세대의 아버지가 머리에 안테나가
뿔처럼 돋친 영상세대의 업힌 아들로부터 목을 죄이고 있다.
물리적으로는 한집안 한밥상에서 밥을 먹고 더불어 살지만 심리적으로는
끊어진 둑을 두고 괴리돼 있으며 그 단절의 여울목에 책들이 표류하고
있다. 책이 아니라 정신이나 사상이 묵중하게 담긴 용기들이다.그
가운데에는 걸필(乞筆)이며 보장(補帳)이며 억서(憶書)도 부침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