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시인 대통령

bindol 2022. 11. 26. 08:42

[이규태 코너] 시인 대통령

조선일보
입력 2002.04.17 20:11
 
 
 
 


방랑으로 여생을 산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음악가요
조각가라면 곧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산문(山門)을 옮겨다닐
때마다 그 산에서 자란 나무로 금(琴)통을 만들고 그 산에서 자란 짐승
심줄로 슬(瑟)을 삼아 삼현금(三絃琴)을 만들며 그 산에서만 나는 소리를
즐겼다. 나무토막 하나를 들고 절방에 들어가 몇 달이고 틀어박혀 이를
깎고 문질러 소나 여인이나 스님상을 조각한다. 더 이상 깎고 보탤 게
없으면 들고 나와 불타고 있는 아궁이에 던져버린다. 이처럼 남과는
아랑곳없이 즐기는 도락예술 도락학문을 세컨드 컬처ㅡ제2문화라 한다.
임꺽정(林巨正)은 소리나 피리를 잘하는 명인을 납치하여 이를 달밤에
부하들을 모아놓고 피로시킴으로써 감정 공감대로 유대를 시켰던
예인대도(藝人大盜)였다.

슈바이처는 노벨평화상을 탄 신학자다. 하지만 바흐 오르간 연주의
대가로 더 유명하다. 품팔이 하인으로 시작하여 페테스부르크의 제국은행
총재까지 오른 슈리만은 그의 제2문화로 고고학에 빠져 그 유명한 전설
속의 도시 트로이를 발굴해냈다. 1차 세계대전 전후에 독립운동을 하고
정계에 발을 딛어 총리 겸 외무장관을 역임한 폴란드의 정치가
파데레프스키는 피아니스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화가요, 소설 「사브로라」를 남긴 작가요,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총리가 「추기경의 연인」이라는 소설을 남긴 제2문화인임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비단 학문이나 예술의 도락가만이 아니다. 미국의 포드 전 대통령은
미시간대학의 풋볼 명 센터로 졸업 후에는 프로구단들에서
스카우트하려고 쟁탈을 벌였던 선수다. 그후 그는 예일대학 코치를
하다가 입대 후에는 해군 코치를 역임한 대통령 축구선수였다. 젊은 시절
호화여객선의 가수로 일했던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 겸
외무장관이 노동자 총파업의 위기 와중인 지금 유엔아동기금 마련을 위해
손수 작사한 대중가요의 음반 취입을 하고, 인도네시아에 항거 독립을
쟁취한 「동남아의 만델라」 동티모르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이 확정된
구스마오는 시로써 국제여론을 환기시킨 시인이다. 제2문화의 위력을
과시하고 있는 작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