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山의 날

bindol 2022. 11. 26. 08:46

[이규태 코너] 山의 날

조선일보
입력 2002.04.14 19:50
 
 
 
 


세계 산의 해를 맞아 많은 행사를 마련하고 있는 산림청에서 산의 날
제정을 두고 여론 조사를 했더니 91%가 찬성을 하고 과반수가 가을에
잡기를 바라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문화 문명을 두고 과거와 현대가
접속되게끔 현대문명을 수용해야 한다는 연결사고가 있고 낡은 과거는
잘라버리고 현대문명은 새롭게 수용해야 한다는 단절사고가 있는데,
후진국이고 비전이 없는 나라일수록 전통문화를 열등시하여 마치
세균이라도 묻은 것처럼 잘라버리는 단절사고가 우세하다. 산의 날도
그렇다. 산에 오른다는 것을 높은 데 오른다 하여 등고(登高)라 했는데,
우리 전통 세시민속에 유월 보름인 유두(流頭)날을
내등고일(內登高日)이라 했고 구월구일 중구(重九)일을 외등고일이라
했다. 내외 법도가 심해 남녀가 따로 등고를 한 것이 다를 뿐이지 산의
날은 예전부터 있었다.

'유두(流頭)날 서방님 두루마기 입고 나무 지게 메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평소에 지게 멘 적이 없던 서방님도 유두날만은 나무 지게 메고
나무하러 가는 것처럼 명분 삼아 딴전 보러 간다는 것을 빗대는 말이다.
유두날에는 부녀자들 노소없이 깊은 산 낙수 지는 물가를 찾아가 옷을
벗고 물을 맞는가 하면 가랑이 벌리고 앉아 머리를 감는다. 혜원의
풍속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유두날에만 묵인되는, 숨막히는
삼강오륜으로부터의 해방구는 뭇 사나이들의 신나는 엿보기 현장이기도
하여 두루마기 입고 지게를 멘다.

중구일인 외등고일에 사나이들이 산봉우리에 오르면 속된 말로
양풍(兩風)을 쏘인다고 하는데 그 하나가 즐풍(櫛風)이라 하여
상투머리를 풀어헤치고 산바람에 날리는 바람 빗질을 했고, 다른 하나는
거풍(擧風)이라 하여 바짓가랑이를 내려 일년 열두 달을 음습한 곳에
갇혀 사는 국부를 들어 강한 자외선에 쪼이고 산바람을 쏘였다. 이처럼
전통시대의 산은 남녀 할 것 없이 삼강오륜으로부터의 인간 해방구였다.
현대에도 해방구 개념은 통한다. 다만 도시화로 얽히고설킨 위선과
형식과 부조리로부터의 해방구라는 것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래선지 산의
날을 따로 정하지 않아도 산은 만원이다. 굳이 산을 자연 상태로
보존하는 계기로 산의 날이 필요하다면 전통을 감안했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