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酩酊 러시아

bindol 2022. 11. 27. 09:01

[이규태 코너] 酩酊 러시아

조선일보
입력 2002.03.20 20:22
 
 
 
 


러시아에서 술로 숨진 사람이 지난해 4만7000명으로 과음이 국가 안보
문제로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알콜 중독자 수는
어른 5인당 한 사람꼴이고ㅡ. 러시아에서는 제정시대부터 금주령,
전매제, 판매시간 제한 등 별의별 시책을 다 써왔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은 술을 못 구하면 메틸 알콜은 고사하고 석유 휘발유까지 마셔 눈이
멀고 죽는 이가 속출한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블라디미르라는 황제가 회교로 러시아의 국교를 바꾸고자 했는데 계율로
술을 금하고 있는지라 러시아 사람에게 술없는 신앙을 갖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러시아 정교로 국교를 삼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교
이전의 러시아 종교는 회교였으며 정교로 개종한 이유 가운데 술의
변수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피터 대제가 천국에 온 레닌을 불러다 물었다. 「그대 정권에서 보드카
도수는 몇 도였나」라고ㅡ. 42도라 대답하자 피터 대제는 그렇다면 굳이
러시아 혁명을 할 의미가 없지 않았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보드카는
45도가 되지 않으면 불순하다는 생각이 러시아 사람들에게 있으며 정치의
잘잘못을 그 보드카의 순도를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로 가늠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 MGM사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초프의 형제」의 촬영을
마치고 시사회를 하는데 제작자가 잦은 음주장면과 주정장면을
약화시켜달라고 주문했다. 이에 감독은 「더 이상 약화시키면 주제도
죽고 영화도 아니게 된다」고 거부했던 것이다. 비단 카라마초프 형제뿐
아니라 러시아 명작의 주인공들ㅡ 이를테면 라스콜리니코프, 네프류도프,
오블로모프, 닥터 지바고에 이르기까지 그 침울한 이미지를 내면에서
소화하는 데 독한 술에 의한 주정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흐루시초프
회고록에 보면 스탈린의 결재는 취중이 상식이므로 그 변수를 가감하는데
고도의 숙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쿠데타 결행 중에 야나예프 전
부통령이나 파블로프 전 총리는 인사불성일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던
러시아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중간단계가 사회주의라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중간단계는 알콜리즘」이란 말도 있듯이 러시아의 정치단계를
말해주는 주량증가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