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로얄 증후군

bindol 2022. 11. 27. 08:55

[이규태 코너] 로얄 증후군

조선일보
입력 2002.03.22 19:56
 
 
 
 

지난 54년 동안 한국인이 특허청에 출원한 상표로서 「로얄」이
91건으로 가장 많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상표로서 선호한다는 것은 그런
이름을 붙이면 잘 사간다는 것이 된다. 비단 '로얄'뿐 아니라 각종
접객업소의 이름이나 자동차·술·시계·냉장고·전축 등 내구소비재
상표로서 선호되는 이름도 골드·수퍼·디럭스·프레지던트·체어맨·
프린스·퀸·살롱·엠파이어·팰리스·거버너·그랜드 등 '로얄'과
같은 최고성 상표가 상식이다. 왜 한국인은 그토록 최고를 좋아하는
것일까.

20세기 후반 들어 도시화가 진행되면서부터 최고병이 번지기 시작했다.
서로의 신원이나 재력을 모르는 사람끼리 접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우위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보다 고급품을 지니게 된 것이다. 조상대대로
한마을에 살아오면서 부엌에 부러진 숟가락 몇 개 있는 것까지 알고 사는
정착사회에서는 고급품을 지녔다해서 신원이 속여질 수는 없는 것이기에
'로얄' 증후군(症候群)이 기생할 수가 없다.

도시화 이동사회에서도 옛 우리 선비의 조건인 수분(守分)
지족(知足)하는 사람은 '로얄' 증후군의 균에 저항력이 강하다. 곧
분을 알고 지족하는 사람은 물건을 살 때 값이 비싸고 명품이라 해서
산다는 법이 없다. 곧 물건은 자신의 연장이다. 하지만 분을 망각하고
지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지닌 물건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척도를
삼으려 든다. 곧 자신이 물건의 연장이 된다. 필요해서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신분 과시의 덤이 붙기에 '로얄' 추구를 한다.

 

'로얄' 증후군은 한국인의 환상상향(幻相上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최고 온도계는 기온이 오르면 수은주가 붉은 금을 떠받치고
올랐다가 내리면 따라 내린다. 하지만 최고온도계는 따라 올랐다가 내릴
때에는 수은주만 내리고 붉은 금은 높은 자리에 남아 있다. 곧 자기의
사회·경제·문화의 실제 수준이나 지위와 자신이 처해있다고 생각하는
수준과 지위와는 공백이 생긴다. 이런 공백에 '로얄' 증후군이
기생한다.

의류·주류·화장품 등 세상의 고급품 명품들이 한국을 겨냥한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심지어 수백만원대 화장품이며 이 세상의
왕가나 쓴다는 주문 생산 유모차까지 한국에 상륙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