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스위스 이미지

bindol 2022. 11. 27. 15:48

[이규태 코너] 스위스 이미지

조선일보
입력 2002.03.17 19:37
 
 
 
 


스위스ㅡ하면 떠오르는 것이 사과와 시계와 영세중립국이다. 가장 오래된
석기시대의 사과 씨앗이 스위스의 호숫가에서 발견돼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아들놈의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놓고 활을 쏴야 했던 사냥꾼
윌리엄 텔의 사과는 악한 권력자의 횡포를 증오하고 맞서 싸우는 자유와
정의와 용기의 상징인 것이다. 스위스에서는 마음의 약속을 다질 때
사과를 잘라 먹는다던데 바로 이 윌리엄 텔의 사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겨울에 스위스 시골을 여행하다보면 양지바른 볕받이에 남녀노소 마을
사람들이 뜨개질하며 유유자적하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죽어가는 스위스 사람들의 손재간을 살리고 보존하려는 수단이라고
들었다. 곧 스위스를 지탱하는 것은 시계공업이요, 이 정밀산업을
유지하는 스위스의 저력은 다름아닌 스위스 사람들의 손재간이다. 쓰면
쓸수록 발달하고 쓰지 않으면 않을수록 퇴화하는 것이 인체다. 산업혁명
이래 현대문명은 손 쓰는 일을 기계가 대행하는 쪽으로 발달해왔다.
스위스 사람들에게 있어 손재간의 퇴화는 시계 공업의 퇴락을 의미하며
국력의 쇠퇴와 맞물린다 하여 손재간 살리는 운동이 뜨개질의 보편화로
나타난 것이다.

시계로 국력을 삼는 나라에서 탈(脫)시간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동차를 다니지 못하게 하는 스위스 알프스의
체르마트에서는 전통있는 시계탑을 없애고 시민으로 하여금 시계를 갖고
다니지 않도록 하는 탈시간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한다. 시계를 갖는다는
것을, 시간을 각박하게 쓰게 하는 문명악으로 보고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어 여유와 자유를 찾는 인간성 회복 운동이 시계의 나라에서 일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알프스 고산과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이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고 전쟁 후의 이해에서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불가침의 중립국을
지탱한 때문이었다. 유엔 산하 대부분의 기관이 스위스에 자리잡고 있고
무기나 용병(傭兵) 수출로 재미를 보고 있으며 세상의 부정한 돈이
스위스에 집결되고 있기도 하다. 그 스위스가 유엔에 가입했다. 중립국은
유지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미국 등 대국 주도의 유엔에 가맹한다는 것은
중립이 이미 기우는 것으로 대국들에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위상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