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오노이즘

bindol 2022. 11. 27. 16:02

[이규태코너] 오노이즘

조선일보
입력 2002.03.04 18:34
 
 
 
 


열차 파업 중 차례 기다리기에 지쳐들 있는데 누군가 새치기를 하자
「오노 같은 놈!」하는 욕이 터져나왔고, 그 말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군중의 흥분으로 당사자는 쥐구멍 찾듯 자취를 감추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욕설 진하기로 추종을 불허하는 우리나라인데도 그보다
고단위·고농도의 욕설로 「오노」가 등장했다는 것이 된다. 우리
한국선수가 1등으로 골인한 것을 후발자인 오노가 가로챘다 해서
얌체족을 비하하는 욕설로 정착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낙하산 인사 등
적격이 아닌 사람을 두고도 오노란 말을 쓰기도 하고, 또 그 사람에게
과분한 대우를 하거나 그가 뜻하지 않은 횡재를 했을 때도 오노의 목에
건 금메달에 비유한다고 한다.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 이후에 오노이즘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부당한 판정에 대한 울분이 응집된 신어(新語)가 아닐 수 없다. 남들이
쌓아놓은 고지를 선점하거나 남을 짓밟고 한탕 노리는 이 오노이즘의
우리말도 없지 않다. 꾀쇠아비니 뺑덕어미가 그것이다. 박타령에서
흥부가 김 부자의 매품을 팔기로 하고 선금 받은 돈으로 며칠 굶은
새끼들 밥지어 먹이는 것을 엿듣고는 그 매품을 가로챈 자가 있었으니
바로 꾀쇠아비다. 따놓은 금메달을 가로챘으니 오노는 꾀쇠아비다.

공양미 300석에 심청이가 팔려간 후 그 돈에 군침을 흘린 뺑덕어멈은 심
봉사와 같이 살면서 갖은 아양으로 돈을 빼돌린다. 심 봉사가 김장자에게
맡긴 몇 백냥 귀덕어멈에게 맡긴 몇 백냥 어디다 썼느냐고 애절복통을
하자, 애가 서서 살구값 몇 백냥 떡값·팥죽 몇 백냥 썼다고 거짓말하여
벌거숭이 만들어놓고 뺑소니 친다. 공양미 팔아 심 봉사에게 들어간
금메달을 가로챘으니 오노는 뺑덕어미다. 시골에서 사랑의 데이트 장소는
보리밭이다. 이 보리밭 정사 현장만 찾아다니며 그 비밀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입마갯돈을 후려 놀고 잘사는「보리밭 파수꾼」도 같은 족속이다.

나치 독일이 베를린 올림픽을 나치즘 다지는 축제로 이용했듯이, 미국이
테러 후의 애국주의를 구심시키고 강화하는 수단으로 무리수를 썼다 해서
올림픽 정신의 내셔널리즘 침식을 오노이즘으로 대변시키기도 한다.
금메달 하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하나로 상실한 신뢰의 총화는 그
금메달 몇 천개로도 보상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