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圓覺寺 터
서울 도심 탑골공원이 성역화되어 어제 독립선언문을 읽는 3·1절
기념식을 시작으로 문을 열었다. 조선조 초 그 터에 있었던 원각사를
복원하려던 계획에 걸었던 기대는 다시 꿈속에 잠기고 만 셈이다.
불심이 남달랐던 세조는 유반으로부터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고려
때부터 있었던 흥복사 터에 이 원각사를 짓고 법회를 열었다. 본당인
대광명전, 수도하는 선당, 종루인 법뢰각, 경판을 보존하는 해장전,
적광문·해탈문·운집문·반야문 등 대소문들, 그리고 현존하는 13층
불탑 등 둘레 1.4㎞에 이르는 대찰이었다. 그 무렵 일본에서 온 사신
가운데에는 승려가 많았는데 원각사에 들르는 것이 관행처럼 돼있었다.
어느 한 사신이 배불하고 나더니 대부분의 부처님은 앉아 계시는데 이
본당 부처님은 서 계시는지라 이 자리에 오래 계시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이 예언을 성사라도 시키듯, 연산군이 집권하면서 본당
불상을 성 밖으로 내가고 승방은 그의 잔치를 위해 동원시킬 기생들
숙소로 만들어버렸다.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면서 원각사는 한성부의
관청건물로 썼는데, 그 관청의 우두머리가 이렇다 할 이유 없이 변사를
했다. 불사를 폐한 것이 빌미라는 풍문이 돌아 인심이 흉흉해지고 관청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민가가 들어서 200여호에 이르렀는데,
명종 때 두 차례의 큰 불로 사찰 건물이며 절 마을이 타버렸다. 불교를
두둔했던 명종은 그 터에 사람이 들어가 살지 못하도록 하여 13층 탑과
사적비만이 보존된 채 한말에 이르렀는데, 해관 업무를 위해 초빙된
영국인 브라운에 의해 근대식 공원으로 조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교 차원을 초월하여 역사의 애환이 농축된 옛 조형물일수록
복원해놓아야 한다. 고려 때부터 있었던 절이라 한국 불교의 흥망과
박해의 역사를 대변하는 원각사요, 또 3·1독립선언의 현장으로 민족을
구심시켰던 성지이기도 하여 관광자원으로 으뜸급에 속하기도 한다. 전
사찰은 어렵더라도 정전과 절문들의 복원은 기대했던 것이다. 서서 나간
대불, 얼마나 노여웠기로 돌아오길 그토록 늦추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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