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미국 애국주의
「빛이 나되 빛나지 말게 하라(光而不燿)」는 노자의 가르침이 있다.
과거의 대과(大科)에 급제 합격증명서랄 홍패(紅牌)를 받고 나면 머리에
어사화(御賜花)를 꽂고 친지 선배를 찾아다니며 인사를 한다. 영광스러운
날인데도 비단으로 성장하지 않고 일부러 허름한 베옷을 입혀 돌리는
것이 뼈대있는 집안의 관행이었다. 노자의 가르침이 한국인의 덕목으로
저변화돼 있었음은 그 밖의 사례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상하없이 조정의
모든 벼슬아치가 참여하는 정시(庭試)를 열어 장원을 특진시키는 제도가
있었다. 선조 때 이덕형(李德馨)이 숙직하는데 「이번 정시에도 이덕형이
장원할 것은 뻔한 일이지ㅡ」 하는 말을 우연히 엿들었다.
정시가 베풀어지던 날 이덕형은 갑작스런 병으로 기거할 수 없다고
핑계대어 참여하지 않았다. 글재주에서 나는 빛을 가린 셈이다. 16세에
등과한 김종서(金宗瑞)가 대신에 오르자 영의정이던 황희(黃喜) 정승이
사사건건 흠을 잡고 기를 꺾어 주변에서 너무 심하다는 말들이 자자했다.
자신의 재기에 겨워 행여나 버릴까 싶어 빛을 그렇게 가려오다가
정승 자리를 물려주었던 아름다운 「빛가리」였다. 빛을 가리는
지혜는 사람이나 나라나 매한가지다.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이 폐막했는데, 올림픽 정신이 쇠퇴하고 그
자리에 미국의 애국주의가 잠식한 올림픽으로 지탄받고 있다. 개막부터
이 승강이는 심각했었다. 테러에 대한 결의와 애국심의 상징인
무역센터의 찢어진 성조기를 들고 미국선수단이 입장하겠다는 것부터
그러했다. IOC의 반대로 올림픽기와 나란히 게양하는 것으로
낙착했지만ㅡ.
개막식 전에 테러 때 희생한 소방사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세리머니도
텔레비전 중계 이전에 하기로 낙착했고, 부시 대통령의 개막연설도
「나는 (개최 도시명)에서 개최되는 (몇)회 동계올림픽대회를
선언한다」라고만 하게끔 돼 있는데 「자랑스럽고 우아한 이 나라를
대표하여」라는 말을 앞에 보탬으로써 말성이 되기도 했다. 경기의
진행도 오심 소동의 빈발로 테러를 극복한 대국으로서의 품도에 상처를
주어 국제무대를 자국의 애국심 고취무대로 사유화했다는 비난이
거세기만 하다. 테러를 현명하게 극복하여 한결 찬란해진 성조(星條)의
빛을 가렸던들 미국은 한결 커지고 빛나 있을 것을ㅡ 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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