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서양 업둥이

bindol 2022. 11. 28. 16:17

[이규태 코너] 서양 업둥이

조선일보
입력 2002.02.14 19:34
 
 
 
 


갓난 아기를 버리는 기아문화도 한국이 서양과 비교하면
인간적이다. 남의 집앞에 버리는 아기를 업둥이라고 한 것부터가 그렇다.
업동이 전화되어 업둥이가 된 것인데, 업이란 전생의 소행으로
현세에 받는 응보로 그 아기가 문전에 버려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업보라는 필연으로 받아들였던 것 자체가 그렇다. 더욱이 그
집안에 재산을 늘려주고 지키는 사람이나 짐승을 업이라 했으니
업둥이는 복과 재물을 불러오는 아기라는 인식도 깔려 있었다. 문전에 와
있는 그 업둥이를 어떻게 외면하고 버릴 수 있겠는가. 아들이면 자손이
귀한 집 찾아 버렸고, 딸이면 무당집 문전에 버렸다. 그렇게 길러져
가계를 잇고 무당을 세습했던 것이다. 전통무가에 「버리떼기」
비중 큰 것이 알 만하다.

이렇게 업과 연결시키거나 부처님의 자비 품안인 산문 앞에 버려
절에서 길렀다. 역대 고승 가운데에는 이 산문 업둥이 출신이 많았으며
마지막 황비 윤씨가 만년에 의지했던 만향 스님도 통도사
산문 앞에 버려진 업둥이였는데 노란 금부처가 되어 그 앞에 쌓인 엿이랑
곶감이랑 집어먹고 살면 좀 좋겠느냐는 어머니의 설득을 기억하고
있었다.

페로의 동화에 가난한 초부가 일곱 아이를 낳아 숲속에 버리는 이야기가
있다. 식인귀의 집에 갇힌 이 버리떼기들이 마법의 장화를 신고 탈출,
가난한 부모를 찾아가 효도한다는 줄거리다. 이처럼 숲속에 아기 버리는
것은 유럽 동화의 한 유형을 이루고 있으며 18세기에 들어 버리는 곳이
숲이 아니라 교회로 바뀌었을 뿐 기아문화는 계승되었던 것이다. 동세기
유럽의 위대한 사상가 장자크 루소의 「고백」에 보면 그는 가정부
테레즈와의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를 다섯이나 차례로 교회의 기아 상자에
버렸다고 했다. 18세기 통계에 보면 파리의 결혼 쌍수보다 기아수가 한결
웃돌고 있다.

교회마다 투르라는 회전상자 시설을 해놓고 이곳에 버릴 아기를 담아
돌리면 교회 안으로 돌아가 수용되게 돼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출산하여 시설에 맡기는 익명출산 제도가 생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 이웃 독일에서는 뒤늦게 버리떼기 포스트가 거리에
생기기 시작, 함부르크에서만도 2년 동안에 40개로 늘었다는 엊그제
보도가 있었다. 역사는 진전하는 것인지 후퇴하는 것인지 알쏭달쏭하게
하는 서양 업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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