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정초 風流

bindol 2022. 11. 28. 16:18

[이규태 코너] 정초 風流

조선일보
입력 2002.02.13 20:04
 
 
 
 


우리나라 세시민속의 과반이 설에서 대보름 사이에 집중돼 있을 만큼
행사도 많았지만 그간에 고답적인 풍류도 비일비재했다. 지금은 기억하는
이도 없지만 그 풍류를 되뇌어 보면 현재의 삶이 얼마나 각박한가를
절감하게 된다. 빙화라는 자연예술도 그것 중 하나이다. 정월
인일(人日)에 세숫대야만한 나무 그릇에 물을 담는다. 그 복판에 질그릇
하나 엎어놓고 방문 밖에 놓아두고 잠든다. 자고 나면 그 나무대야에는
다양한 얼음꽃이 핀다. 수목·화초·금수(禽獸)·전각(殿閣)·차마(車馬)
같기도 한 이 빙화를 들고 사랑에 달려가 어느 누구의 빙화가 품수가
높은가를 겨룬다. 그 그림이 십장생(十長生)이거나
송죽매란(松竹梅蘭)이면 품수가 높아진다. 선비들끼리 빙화계를 맺기도
하여 그 빙화 형상이 거북이를 닮았으면 「거북이」로 한 해 동안 별명
삼아 부르는 풍류도 있었다. 이렇게 인격 품수를 매기기도 하고 그해
운수를 빙화를 보고 예언하기도 했다. 18세기의 실학자 이익(李瀷)은 이
빙화를 고증하고 「난초 대나무 등 그 문채가 찬란한 빙화를 나도 많이
보았다」고 적어남겼다.

새해 들어 첫 닭띠 날인 상유일(上酉日)에는 학(鶴)을 기르는 선비들이
제각기 어깨에 얹고 와 품평하는 풍류도 있었다. 옛 벼슬아치들, 궁이나
세도가 가문에서 청탁이 오면 집에서 기르는 학을 어깨에 얹고 나가는
것으로 거절을 묵시하는 관행이 있었다. 또한 불의를 등지고 낙향한
선비들끼리 학을 기르는 학사계(鶴社契)를 맺어 의로움과 올바름을
지켜낸다는 의지를 그로써 다졌다. 이를테면 연산군의 폐모를 반대하여
낙향한 조춘풍(趙春風)의 학사(鶴社), 출사를 권유하러 오면 학을 메고
나갔던 최영경(崔永慶)이 그러했다. 콘테스트에서는 누구의 학이 머리
벼슬이 가장 붉은가, 어느 학의 울음소리가 가장 멀리 떨치는가, 어느
학의 눈이 가장 멀리 보는가, 어느 학이 한 다리로 가장 오래 서있는가,
어느 학이 보다 품위있게 춤을 추는가 등으로 상상(上相)을 선출했다.
이렇게 기르는 데는 대단한 정성과 공이 들게 마련이며 그로써 정신을
닦았으니 정신작업으로 고개가 숙여지는 조상의 풍류였다. 나라 다스리는
사람의 정신이 누더기처럼 나부낄 때일수록 새삼스러워지는 망각된
풍류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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