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개팔자

bindol 2022. 11. 28. 16:19

[이규태 코너] 개팔자

조선일보
입력 2002.02.09 19:55
 
 
 
 


한말 서울 인사동에 안동김씨 세도가인 혜당댁(惠堂宅)과
호판댁(戶判宅)이 솟을대문을 맞대고 있었다. 팔도 350고을 수령들의
뇌물 실은 수레가 줄지어 빨리 바치고 돌아가고자 종들에게 약과며
약식을 바치면 이들은 이를 짐승 우리에 던져버리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팔도에 「혜당댁 나귀는 약식을 잘 자시고 호판댁 큰말은 약과도
아니 잡순다」는 노래가 나돌았었다. 서민들은 먹기는커녕 보지도 못했던
약식과 약과인데 말이다. 그러했듯이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애견 디스비는 애플 파이도 안 먹었다 하여 「앙투아네트의 애견」 하면
주제넘은 행위를 빗대는 말이 되고 있다.

「부엌 강아지」 하면 상팔자를 빗댄 속담이다. 부엌의 가장 따스한
자리에서 하루 종일 누워있기만 하면 며느리가 오가며 찌꺼기 음식을
던져주는데 개 쪽에서 보면 산해진미가 아닐 수 없다. 시어머니를 향한
스트레스 해소의 간접 수단으로 이따금 며느리에게 배때기 한번 차이고
깨갱거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그야말로 개 팔자요, 개가 부엌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이유가 그에 있는 것이다. 어느 한 부잣집 머슴이 하루 종일
등짐 지고 김매고 돌아와 지친 몸으로 밥상도 제가 들어다 먹는 신세가
하도 서러워 종일 먹고 자고 노는데 밥까지 가져다주는 개 팔자가 부러워
부엌 강아지 앞에서 푸념을 했다. 지나가던 상전이 듣고 그렇게 부러우면
개처럼 살게 해주마 하고 개끈으로 묶어 부엌에만 살게 하고 끼니되면
걸게 밥상을 차려 갖다주곤 했다. 하루 이틀은 먹고 자는 것이 편하기
그지없었으나 사나흘이 지나자 하루 두 짐 하던 나무를 석 짐, 다섯 짐
할 터이니 놓아달라고 읍소를 했다.

사상 가장 융숭한 개 팔자는 고려 충열왕 때 개성의 정삼품(正三品)개일
것이다. 염병으로 양친을 잃은 눈 먼 아이 하나가 개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끼니가 되면 꼬리잡혀 걸식시켜 길러냈다. 조정이 알고 정삼품
품작을 내리고 응분의 대접을 했다. 품작을 새긴 목패를 목에 걸고
다녔으며 행인들이 보면 하마하여 절을 하고 지나갔기에 정승 부럽지
않았다 하니 상팔자가 아닐 수 없다. 공항에서 폭약이나 마약 탐지를
하는 탐지견(探知犬)의 개집이 소개된 것을 보면 목욕, 체력 단련시설,
건강진단 서비스에 털 손질, 고단백 미제식품에 강아지 놀이방까지
고급호텔 못지않다 했으니 정삼품 개를 웃도는 개팔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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