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누더기 인형

bindol 2022. 11. 28. 16:21

[이규태 코너] 누더기 인형

조선일보
입력 2002.02.08 20:20
 
 
 
 


대보름날 짚인형인 제웅의 뱃속에 동전을 담아 거리에 던져두면
아이들이 주워감으로써 그해에 닥칠 액(厄)을 파는 세시 민속이 있었다.
곧 없애고 싶은 악의 상징이 제웅이다.

1960년대 초 소록도의 환자지역과 미감아(未感兒) 수용지역 간의
완충지역에 팔다리 찢긴 누더기 인형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버려진 내력은 이렇다. 외국에서 온 구호물자 가운데 흑인인형이 있어
순영이라는 아이 차지가 됐다. 어머니가 그리운 순영이는 이 인형
앞치마에 「어머니」라 쓰고 소꿉놀이에서 어머니로 삼곤 했다. 한데
다른 아이들이 「네 어머니가 깜둥이야」하며 놀려댔다. 그래서 이
인형을, 더불어 수용된 흑인 소녀인 리자 자매에게 던져 주었다. 낯선
땅에서 천형(天刑)이라 하여 어머니로부터 격리당한 것도 서러운데
수용소에서마저 차별을 받아야 했던 리자 자매는 아픔을 참지 못해 이
인형의 옷을 갈기갈기 찢고 팔다리에 칼질하여 완충지대에 버린 것이다.
여기에서 누더기 인형은 지구상에 잔존한 모든 차별악을 몸에 담은
제웅인 것이다.

월남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60년대 후반 사이공에서 월남영화 「누더기
인형」을 관람한 적이 있다. 사나이들은 일선으로 다 가고 앳된 아가씨들
틈에서 흐느낌으로 일관됐던 기억이 난다. 공산 게릴라와 정부군의 전쟁
틈에 끼여 한 무고한 소녀가 죽어간다. 메콩강의 갈대밭에 피흘리고 죽은
소녀의 손에는 아오자이 차림의 작은 인형이 꼬옥 쥐어져 있었다. 인형은
소녀가 흘린 피로 젖어 있었고 갈대밭의 진흙에 범벅이 돼있었다. 어디서
할퀴었는지 옷도 찢기어 있었다. 이 누더기 인형은 바로 그 당시
베트남의 상징이었다. 이 인형을 빼앗아 든 정부군 병사는 전쟁에 대한
허탈감을 절감한다. 그 허탈감이 자학(自虐)으로, 망상(妄想)으로, 또
정의감(正義感)으로 연계되어 용기로, 반항으로, 만용으로, 비열로
얼룩지며 줄거리를 이어간다. 여기에서 누더기 인형은 지구상에 남아있는
전쟁악을 대변하는 제웅이었다 할 수 있다.

앤드루 영국 왕자의 전부인인 세라 퍼거슨이 어떤 영문이지 9·11테러로
주저앉은 뉴욕 무역센터에서 잃어버린 인형을 지난 6일에야 잿더미
속에서 누더기 인형으로 발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는 테러악을
뱃속에 담은 제웅이겠고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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