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精子아빠
홀아비의 과부약탈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기를 꼭 가져야만 되는
여인의 총각약탈도 있었다.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그 사례가 실려있다. 정덕년이라는 사람 집에 시골에서 서생 하나가
과거치러 올라와 머물고 있었는데 야밤에 종가를 지나고 있을 때 일이다.
장사 네댓 명이 이문께에서 불쑥 몰려나오더니 이 서생을 때려엎어
마련해온 커다란 자루에 담아묶는 것이었다. 둘러메고 이 골목 저 골목
누빈 끝에 담 안으로 던져놓더니 자루를 풀고 정중히 방안으로 모시는데
비단 이부자리가 깔린 신방이었다. 조금 있으니 성장한 여인이 들어와
동침을 청하고 파루(罷漏)의 북소리가 나자 여인은 사라지고 장정 네댓이
다시 나타나 자루에 담아묶고 골목길을 누비더니 납치해간 종가에
풀어놓은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서생 대신 소금장수나 무시로장수,
땜통장수 등 뜨내기를 은밀히 들여 동침시키고 입마갯돈을 단단히 주어
은밀하게 씨를 받았다.
이 같은 약탈동침이나 뜨내기동침의 관행을 씨내리라 하는데 씨받이의
반대말이다. 전통사회에서 혈연상속·제사상속·재산상속을 시킬 아들을
못 낳는다는 것은 존재가치를 상실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아내의
결함으로 아기를 못 낳을 경우에 직업적으로 아기를 낳아주고 다니는
씨받이 부인을 들여 아기를 얻는 것이 씨받이요, 남편의 결함으로 아기를
못 낳을 경우에 이처럼 약탈동침 뜨내기동침 등으로 아기를 갖는 것이
씨내리다. 씨받이나 씨내리는 혈통을 위장하는 속임수이기에 아기가
자라서 죽도록 내가 너의 어머니요 아버지임을 밝혀서는 안 되는
금기의 조건부다. 그리하여 입을 막는 재물이 주어지고, 제 자식
보고 싶다 해서 동구밖 30리 안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등의 언약을
맺기도 한다.
인공수정에서 정자 공여자를 밝히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요, 그로써
야기될 혈연적·인륜적·법률적·상속적 갈등 등을 막는 수단도 되기
때문이다. 한데 인공수정 사상 최초로 미국에서 18세 난 소녀가
어머니에게 정자를 제공한 생물학적 아빠를 만났다는 보도가 있었다.
아빠·엄마를 보고 싶고 찾고 싶은 원초적 본능으로는 그러해야 할 일
같지만, 그로써 야기될 후유증으로 미루어 그 비밀은 지켜졌어야 한다고
본다.
'이규태 코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규태 코너] 시금치 돼지 (0) | 2022.11.28 |
---|---|
[이규태 코너] ‘눈물’ 소동 (0) | 2022.11.28 |
[이규태 코너] 사라진 榜 (0) | 2022.11.28 |
[이규태 코너] 햇빛 살인 (0) | 2022.11.28 |
[이규태 코너] 누더기 인형 (0) | 2022.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