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용간란 할머니
옛 선비나 부호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대한 책이 엊그제 본지에
소개되었다. 12대 만석꾼 9대 진사를 배출한 경주 최부잣집의 철학은
만석 이상의 재물은 못사는 사람에게 베풀고 백리 주변에 굶는 사람을
없게 하며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않음으로써 부(富)와 벼슬과 권력
때문에 척 짓지 말고 살라는 것이었고 그 때문에 한국사상 유일무이하게
부와 덕망과 이름을 10대 이상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에는 서양사회에 있어 '귀족신분의 의무'란 뜻이었으나 한국의
전통 상류사회에도 이처럼 정신적 의무가 주어져 있었고 서민층의
하류사회에도 나름대로의 정신적 기틀이 잡혀 있었다.
옛날 어머니들은 시집 간 딸이 사위에게 얻어맞고 친정으로 쫓겨오면
어느누구의 잘잘못 이전에 예전에 저지른 자신의 어떤 그릇된 소행이
인과(因果)가 되어 응보(應報)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했다. 손자가 벌에
쏘여 울고 들어와도 지난날 걸승을 박대한 인과라는 등 자신의 어떤
잘못에 대한 응보로 합리화했다. 어떤 이가 사주팔자보다 장수하여
점쟁이에게 물었더니 선친께서 섣달 그믐날마다 갚지않은 빚문서들을
꺼내어 태워버린 데 대한 응보라고 해석했다. 뭣인가 불행이 닥치면
조상까지 소급되는 지난날의 인과로 감수하고 웬만한 고통이라도
감내하며 그 업(業)을 풀었던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음식점을 하는 한 할머니로부터 밥 팔아 10년 동안
모았다는 1000달러를 충청도 모 학교에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일이
있다.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자모회에서 교실 커튼을 만들어 다는데
자투리 남은 것이 있어 딸에게 짧은 치마 만들어 입힌 것이 가책이 되어
그 업풀이로 푼돈을 모은 것이라면서 그 자투리 값을 갚아달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인과의 업풀이가 우리 옛 서민이나 상민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다.
남편이 낸 산불의 보상금을 22년간에 걸쳐 갚아 감동을 주었던
용간란(龍干蘭) 할머니가 성금을 모아 홍천에 칼국수집을 냈다한다. 용
할머니의 변상이 준법정신이 투철했다기보다 한국 서민에게 체질화된
인과에의 업풀이였으며 칼국수 팔면서도 못다 푼 업이 남았으면
로스앤젤레스의 할머니처럼 그렇게 살아갈 것이니 가난하지만 부러운
조상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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