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人情 담보대출

bindol 2022. 11. 28. 16:37
조선일보 | 오피니언
 
[이규태 코너] 人情 담보대출
입력 2002.01.24 20:34:18

혈연의 농도를 촌수로 나타내는데 삼촌(三寸)까지만 있고 이촌(二寸) 일촌(一寸)은 없다. 따질 필요가 없을 만큼 피의 결속농도가 진하다 해서 가리지 않을 뿐이지 이촌은 형제 간이요 부모와 자녀 간이 일촌이다. 반촌(半寸)이란 말도 쓰는데 일촌은 자녀측에서 본 부모와의 인정 밀도요,반촌은 부모측에서 본자녀와의 인정 밀도다. 곧 이 세상에서 가장 인정이 짙은 관계가 부모와 자녀 간인 것이다. 그러했기로 신은 아브라함의 신심을 시험하고자 늘그막에 낳은 아들의 희생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의 영웅 에프타는 개선하는 그를 반겨 맨 처음 달려오는 사람을 희생시키는 조건으로 지배자가 될 것을 신탁(神託)받는다. 그의 외동딸이 맨 먼저 달려올 것은 정한 이치다. 이처럼 신은 인간의 의지를 시험할 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의 희생을 요구했으며 그것이 바로 부모와 자녀 간을 결속시키는 인정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적들은 부녀자 겁탈을 일삼았는데 어머니가 집안에 숨어 나타나지 않으면 이를 유인하는 수단으로 나이 어린 아들딸을 잡아 작두날 아래 뉘어놓고 스스로 걸어나오지 않을 수 없게 했던 것이다. 가장 확실한 유인 수단이면서 가장 간악한 인정 담보의 범죄였다. 인조대왕은 범죄를 밝히는 데 인정을 악용하거나 담보로 잡거나 하면 정승 판서까지 책임을 소급시켰다. 대흥산성에서 은을 훔친 혐의자의 아들을 잡아다 자기 아버지 죄를 추궁시킨 일이며, 후궁 무덤의 도굴혐의자 아들을 잡아다가 아버지 죄를 대라고 고문한 것을 두고 ‘은을 훔치고 도굴한 일은 기사지소(其事至小)하고 강상(綱常)을 패상시킴은 기사지대(其事至大)하다’는 명언을 남김으로써 정치(情治)를 법치(法治)에 선행시켰던 것이다. 부모자녀 간의 인정은 신이 외에는 세상의 어떤 명분이나 논리로도 이용해서는 안 된다. 보도된 바로는 대학가에 학생을 상대로 무담보 무보증의 고리사채가 극성을 떨고 있으며 ‘스무 살 론(loan)’이라는 신어를 모르는 학생이 없다 한다. 갚을 보장이나 능력도 없고 또 담보 없이 100만원대 1000만원대를 대출해준다는 이면에 ‘인정 담보 ’의 복선이 깔려있는 것이다. 곧 부모가 대신 갚아준다는 개연성을 담보로 한 것이며 부모가 외면하면 괴롭혀가며 받아낸다 하니 담보에 그치지 않는 인정 파괴의 신종 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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