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평화 의식’

bindol 2022. 11. 29. 15:57

[이규태 코너] ‘평화 의식’

조선일보
입력 2002.01.20 19:18
 
 
 
 


이스라엘 사해(死海)변에 로마에 저항했던 이스라엘의 마사다 요새가
있다. 예루살렘을 함락당하자 유대인들은 이 요새에 포위당한 채 7년간을
버티다가 노예가 되느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960명이 집단자결을 감행한
비극의 현장이다. 온 세계로 이산한 유대인들이 순례하는 성지가
돼있으며 뱀길(蛇道)로 불리는 좁다란 외길을 한 시간 남짓 오르면
요새에 이른다. 이곳을 순례하는 유대인들은 예외없이 마사다의 흙을
마련해온 병에 담아가게 마련인데 비록 이산해 살고 있더라도 이 집단
자결로 과시한 유대인의 구심력(求心力)을 그들의 피가 스민 그 흙에서
얻고자 함일 것이다. 그래선지 이산해 살고 있으면서 과시되는 강력한
유대인의 단결력을 마사다 정신이라고 한다. 그 정신을 물질로 결정시킨
것이 바로 마사다의 흙인 것이다. 요르단강 그리스도의 세례현장에 가 그
요르단 강물을 빈 병에 담아 팔고 있음을 보았다. 베들레헴 성탄교회
앞에 가도 이 성탄지의 흙을 십자가 마개를 한 유리병에 담아 팔고도
있었다.

이 모두 흙이나 물에 스며있을 정신에의 가치부여이며, 우리나라에도
토석에 스민 상징성에 가치부여를 하는 관행이 없지 않았다. 섣달
그믐날이나 정월 대보름날 전야에는 부잣집이나 벼슬아치 집에서 건장한
장정들이 몽둥이 들고 집둘레를 지키게 마련인데, 숨어들게 마련인
흙도둑을 막기 위해서였다. 부잣집 흙을 훔쳐다 아궁이에 바르면 그
재복이 옮아붙고 벼슬아치 집 흙을 훔쳐 아궁이에 바르면 그
문운(文運)이 옮아붙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각기병 환자가 생기면
고향 흙을 먹이고, 상사병이 생기면 그 상사난 색시집 뜰방 흙을
먹였으며, 과거보러 가는 선비에게는 문묘나 성균관 뜰방 흙을 파다
먹였던 것도 그것이다.

지금 탈레반으로부터 수복시킨 아프가니스탄 북부지역에서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뭣인가 땅에 묻고 다니는 모습이
보도되었다. 바로 테러로 주저앉아버린 뉴욕 세계무역센터의 잔해나 자갈
흙들을 이렇게 묻고 있으며, 이 의식은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걸쳐 지속될
것이라 한다. 이를 묻는 뜻은 「평화를 공격했던 자들은 반드시
패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평화의식」이라고 설명했다. 한줌 흙도 뜻이
들어가면 이렇게 소중해지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