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읽기 43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3] 종이 얼굴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3] 종이 얼굴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2.25 03:00 마스크를 오래 쓰다 보니 모르는 얼굴과 가까이 일하는 경우가 생긴다. 마스크에 가린 코와 입은 나의 짐작만으로 메워진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 얼굴을 상상하는 것은 뭔지 모를 애틋함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싶어 하고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인간의 가장 큰 경쟁력인 기억과 상상을 만든다. 무엇을 보고 알게 되느냐가 곧 그 사람의 얼굴이 된다. 독서 예찬론자였던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의 ‘마흔이 넘은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결국 ‘무엇을 보느냐가 그 사람의 얼굴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임수식, ..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2] 아버지와 아들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2] 아버지와 아들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2.11 03:00 눈길을 걷는 두 사람, 아버지와 아들이다. 모자를 눌러 쓰고 두툼한 외투를 입은 부자의 뒷모습이 언뜻 정겹게도 힘겹게도 보인다. 어느 쪽일까? 날이 흐려 그림자도 없으니 한낮인지 해질 녘인지도 도통 알 수가 없다. 아버지의 등짐은 무거운지 가벼운지, 아들의 얼굴은 야위었는지 통통한지, 집에서 나오는 길인지 돌아가는 건지… 정답 없는 질문들이 사진의 깊이를 더한다. 정해창,무제(망태를 멘 아버지와 아들), 50.1☓40.4cm, 1929 뒷모습은 스스로도 확신하기 어려운 것이라던 미셸 투르니에가 옳았다. 어쩌면 그래서 뒷모습은 매번 끝이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만든다. 오늘은..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1] 입춘대길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1] 입춘대길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2.04 03:00 지금에 관하여(Speaking of Now) /정경자, 2013년 현실과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게 사진의 매력이다. 현실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걸 보여주는 사진은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가능하더라도 그런 사진이 현실보다 더 매력적일 순 없었을 것이다. 꽃을 찍은 사진이 실물 꽃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찍은 사람이 찾아낸 아름다움이 사진에 더해졌기 때문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게 현실의 전부라면, 그래서 궁금할 것도 이해할 일도 상상할 거리도 없다면, 세상살이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을 게다. 지금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듯이, 사진은 자주 보이는 것 너머를 추구..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0] 밥상 위에 수저 꽃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0] 밥상 위에 수저 꽃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1.28 03:00 이갑철, ‘충돌과 반동’ 연작 중, 안동, 1996 이제 곧 설이다. 확진자 수를 매일 뉴스로 접해 온 지가 만 2년을 넘어서고 있다. 이번 설에도 고향 방문과 모임을 자제하라는 당부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몇 번의 충격적인 고비가 있었고 어찌어찌 우리는 살아남았다. 두렵고 가슴 아픈 시간을 쓸어안고 코로나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 간다. 산 자들의 시간은 변함없이 흐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생각만으로 온갖 희생과 인내를 받아들이기란 여전히 힘겹다.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때이다. 이갑철의 사진에선 혼이 보인다. 본디 정신이나 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9] 시간을 넘어선 씨앗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9] 시간을 넘어선 씨앗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1.21 03:00 씨앗 이야기/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제공 사진은 오래전부터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추구했다. 사진술의 발명 이후 카메라가 눈보다 선명하고 세밀하게 대상을 기록할 수 있게 되기까지 불과 100년도 걸리지 않았다. 기계를 이용해서 더 많은 시각 정보를 얻고자 하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의 만남은 언제나 놀랍다. 세계 유일의 야생식물 종자 영구 저장고인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 볼트’는 전 세계의 종자 4084종 9만2681점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의 연구원들은 미세 조직을 3차원으로 관찰할 수 있는 주사전자현미경(SE..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8] 가벼운 예술, 무거운 삶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8] 가벼운 예술, 무거운 삶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1.07 03:00 황규태, contact, 2005년 인생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거다. 만약 삶의 시계가 멈추는 때를 미리 알고 있다면 결말부터 보게 된 공포 영화처럼 뭔가 바람 빠진 느낌이 들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삶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중요한 동력이므로,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하루하루는 각성 없이 느슨하고 지루해질 것이다. 나에게 내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의 나는 깨어 있어야 하고 또 깨어 있을 수 있다. 황규태(84)는 디지털 미디어를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소셜네트워킹서비스에서도 활발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작가이다. 작가로서 자신..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7] 세상을 고귀하게 바라보는 시선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7] 세상을 고귀하게 바라보는 시선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1.12.31 03:00 조덕현, 유크로니아 2111-2, 2021. 지금 여기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 행복의 기본이라고 한다. 한 해를 무사히 보냈으니 배운 대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족(自足)을 다짐한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슬그머니 미래에 대한 기대가 올라온다. 솔직히 새해가 올해보다 나아졌으면 좋겠다. 친구도 편하게 만나고 싶고 마스크도 벗고 싶다. 신년 운세를 믿거나 말거나,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질 거라는 위로다. 아무리 정신 승리를 하고 싶어도 현실은 고단을 면하기 어려우니 이상향(理想鄕)이 달리 생겨난 것이 아니다. 조덕현의 작품 속 시간은 가정법의 역사를 ..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6] 황금빛 달콤함에 안녕을 고함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6] 황금빛 달콤함에 안녕을 고함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1.12.24 03:00 구성연, sugar11, 2015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다. 길거리 크리스마스 캐럴은 언제부턴가 사라졌고 팬데믹의 두 번째 연말은 뉴노멀을 만들고 있다. 살아가는 게 달콤하기만 하다면 지금보다 더 신이 날까?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너무 달면 물리기 마련이다. 이제 우리는 익숙한 듯 낯선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보듬어 안고 과거를 잘 떠나보내야 한다. 구성연의 ‘설탕’(2014~2017) 연작은 말 그대로 설탕으로 만든 오브제들을 촬영한 것이다. 작가가 직접 설탕을 녹여서 화려한 그릇 형태로 물건들을 만들고 하나하나 쌓아 가면서 세트를 제작..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 나만 없어, 고양이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 나만 없어, 고양이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1.12.10 03:00 권오상, 요다, C-print, mixed media, 2016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건 아주 최근이다.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현생 인류는 굶어 죽기보다 비만으로 죽는 게 더 두려운 경험을 처음 하는 중이다. 먹을 걱정을 면했다고 걱정이 사라졌을 리 없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단계별로 정리해온 심리학자들은 섭생과 같은 기본 욕구 다음엔 친밀감이라는 숙제가 온다고 했다.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주요 과제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친밀감에 기초한 관계, 즉 가족이나 연인, 친구는 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심리적 안전망이다. 요즘처럼 이불 밖이..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읽기] [4] 초록이 좋아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읽기] [4] 초록이 좋아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1.12.03 03:00 윤정미, 성연이와 그녀의 초록색 물건들, 2008 살다 보면 법보다 가깝고도 강력한 규제력을 갖는 규칙들을 쉽게 마주하게 된다. 하필 딱 내 앞에 앉은 상사의 ‘부먹’ 탕수육 취향처럼 일시적으로 동조 가능한 것은 그래도 참을 만하다. 여자니까 화장해야 한다거나, 남자니까 운동을 잘해야 한다는 식의 편견에 가득 찬 잣대는 절대 강요하거나 강요받고 싶지 않다. 상식이나 관습을 따르는 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예의라면, 강요된 규칙은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우리는 감수성과 취향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성별⋅연령⋅인종 등 타고난 요인은 누군가를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