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읽기 43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23] 나와 하늘 사이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23] 나와 하늘 사이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5.27 03:00 김광수, 나의 구름, 1993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타이핑을 한다. 타닥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음악 소리처럼 공간을 메운다. 가끔 울리는 메신저의 알림음, 공기청정기와 에어컨이 내는 일정하고 낮은 소음, 간헐적으로 컴퓨터 외장 하드 돌아가는 소리가 뒤섞인다. 마감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모니터에 띄워 둔 사진 속 구름을 보느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릴 겨를이 없다. 고층 건물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세상은 진공 상태다. 성능 좋은 창호가 외부의 자극을 단단히 막아준다. 덕분에 창밖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건물들 사이로 조각 난 하늘엔 움직임도 소..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22] 임을 위한 행진곡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22] 임을 위한 행진곡 신수진 예술 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5.20 03:00 이상일, 광주 망월동, 1991 인간은 오늘만을 사는 숙명을 지녔음에도 역사를 말할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오늘이 모두의 역사가 되는 시간을 우리는 매일 경험한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내일 어떤 의미로 자리 잡을지를 당장은 알 수 없지만, 그 장면이 얼마나 많은 기억의 층위를 소환하는지에 따라 역사성을 논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장면은 그 자체로 과거를 향해 많은 연결 고리를 지닌다. 시간을 넘나드는 연결성이 기억의 의미를 풍성하게 만들고 낯선 오늘을 역사로 자리 잡게 한다. 보수 정당 대통령이 광주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 유가..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21] 한국의 가족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21] 한국의 가족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5.06 03:00 주명덕, ‘한국의 가족’ 연작, 서울 동부이촌동, 1971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연달아 있는 5월의 시작이다. ‘가정의 달’이라는 말은 구식이 되었고, 엔데믹의 첫 징검다리 연휴에 도심이 한산하다. 가족의 형태는 생물처럼 변한다. 우리는 스스로 인지하는 것보다 휠씬 빠른 속도로 새로운 방식을 택하며 살아간다. 누구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지, 결혼을 해야 할지,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쓸지, 어디에 살지, 무엇을 소비할지 등 생활을 위한 사소한 질문부터 인생을 위한 중요한 결정까지 개인의 고민들이 모여서 동시대의 사회상이 형성된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선 열 집 중 네 집 이상이 ..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20] 반려식물 시대의 파테크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20] 반려식물 시대의 파테크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4.29 03:00 김영수, ‘파’, 전라남도 구례, 2005 팬데믹이 끝나 가나 보다. 정말 끝일 거라 믿고 싶다. 시간이 더 지나면, 그래서 좀 떨어져서 돌아볼 수 있게 되면, 그동안 우리가 겪은 일을 지금보다 잘 이해할지 궁금하다. 지난 2~3년간 일어난 크고 작은 변화의 의미를 알아내려면 시간의 거리가 필요하다. 지금은 무엇을 기억할지를 정해야 할 때다. 그중 하나. 나는 이전보다 집에서 휠씬 많은 시간을 보냈고,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늘렸다. 실패를 반복하던 식물 키우기에 공을 들여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았고, 반려식물이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애정을 쏟게 되었다. 음식을..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9] 주름진 보따리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9] 주름진 보따리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4.22 03:00 김수강, ‘Bojagi 017′, 2004 어릴 적 멀리 살던 외할머니가 집에 오실 때면 양손 가득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울퉁불퉁하게 싸인 묵직한 덩어리들이 거실 한가운데 놓이고 나면 신기하고 흥미진진한 해체 쇼가 시작되었다. 엄마의 엄마가 보자기 속 주머니들을 끝도 없이 풀어헤치는 모습을 엄마와 내가 둘러 앉아 바라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주름진 할머니의 손끝에서 단단히 묶인 매듭이 느슨해지고 이내 스르륵 열리던 순간은 짜릿했다. 펼쳐진 보자기에 남은 주름을 차곡차곡 손으로 쓸어가며 작은 네모로 접어 개던 엄마의 손끝을 어느새 내가 따라 한다. 그..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8] 아래를 보아도 하늘은 있다

비가 오는 날에만 살아나는 감흥이 있다. 빗줄기에 가려진 시야, 부스스하게 고부라진 머리칼, 빗방울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 습기 찬 표면을 만지는 촉감 등등이 낭만과 현실 모드 중 어느 쪽으로 풀릴지 모른다. 부슬부슬 봄비가 오는 창 밖 풍경은 유난히 한적하고 여유로워서 집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도 잔잔한 음악처럼 들린다. 촉촉한 공기 때문인지 손에 닿는 것마다 부드럽게 느껴진다. 그런데 오늘따라 전화벨 소리가 날카롭게 울린다. 급하게 뛰어 나선 길은 교통체증으로 꽉 막혔고 웅웅거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계단이 젖어서 미끄러지다 겨우 중심을 잡는다. 날씨는 달라진 게 없는데 마음이 널을 뛴다. 높은 습도와 낮은 기압이 수시로 달라지는 감각의 변주를 만들어낸다. 김대수 작가는 오..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7] 창문을 닫았을 때 비로소 열리는 것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7] 창문을 닫았을 때 비로소 열리는 것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4.01 03:00 박찬민, ‘도시’ 연작 중 ‘도쿄’, 100×100㎝, 2018 어릴 적 좋아하던 만화 중에 세계 여행 안내서 같은 연재물이 있었다. 여러 나라 도시들의 역사, 사회, 문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어찌나 재미있었던지 그 만화를 보려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침에 어린이 신문을 들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대학생이 된 후에 처음 유럽 여행을 갈 때도 가방에 그 만화책을 챙겨갔다. 오래 가슴에 품어온 설렘이 여행지에서 되살아나는 느낌이 좋았다.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에서 지적했듯이, 반 고흐의 그림이 프로방스에 대한 기대를 만들고 휘슬러의 그림 속 안개가 ..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6] 세상에 없는 창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6] 세상에 없는 창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3.25 03:00 김희원, '누군가의 창, 스웨덴 여왕', 2011 낯선 창이 있다. 창밖엔 평온한 공기, 따스한 햇볕, 꽤 울창한 숲, 그리고 멀리 물과 하늘이 보인다. 혹여 보기와 달리 바깥 바람이 매섭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창문은 걸쇠까지 잠긴 채로 잘 닫혀 있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고, 나는 안락한 내부에 머물러 있다. 창가에 놓인 두 개의 화분은 나란히 같은 색 꽃을 피웠다.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고, 화병에 꽂힌 꽃보다 오래 볼 수 있을 것 같아 푸근하다.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어도 좋겠고 차 한잔 마시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겠다. 이상하다...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5] 서로 맞서면서 기대는 우리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5] 서로 맞서면서 기대는 우리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3.11 03:00 천경우, Versus #3, 2007, 66×90㎝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집합적 인류의 능력치를 한참 밑돈다. 여럿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혼자서는 꿈도 못 꿀 경우가 다반사다. 인간의 가장 큰 경쟁력은 협력을 통한 지성에서 나온다. 협력은 사회적으로 구축된 체계 안에서 생명을 지킬 뿐 아니라 개개인의 심리적 안녕,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자아 실현에 이르기까지도 필수적인 덕목이다. 천경우 작가는 독일 브레멘에서 거주하던 시절에 두 사람이 끌어안은 모습의 ‘버서스(Versus)’ 연작을 만들었다. 지역에서 자원한 스무 살 전후 ..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4] 끝나지 않은 전쟁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4] 끝나지 않은 전쟁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03.04 03:00 오형근, 벚꽃나무와 군인, 그리고 군견 북두, 2010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전쟁이다. 실시간으로 뉴스가 전해진다. 민간인 사상자 수가 늘어난다. 불안은 금세 전 세계로 전파된다. CNN이 걸프전을 생중계한 지 30년이 지났고, 이제는 SNS가 전쟁을 퍼 나른다. 남녀노소 누구나 볼 수 있는 뉴스의 눈높이에 맞추어 끔찍한 장면은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야간 공습은 영화나 게임에서 본 것보다 덜 폭력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현실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불안이 차곡차곡 마음에 쌓인다. 오형근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