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庸

和而不流

bindol 2019. 4. 6. 20:14

10-05 君子和而不流하나니 强哉矯中立而不倚하나니 强哉矯國有道不變塞焉하나니 强哉矯國無道至死不變하나니 强哉矯

그러므로 군자는 화하되 흐르지 아니하나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중립하여 치우치지 아니하나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있음에 충실함을 변치 아니하나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음에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나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 抑女之强也猶移也猶實也國有道不變以趨時하고 國無道不變以辟害하니 有道無道一也强貌或爲色이라

이는 아니, 너의 강함인가. ()는 옮김과 같음이라. ()은 실함이라. 나라에 도가 있음에 때를 따라 변하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음에 해를 피해 변하지 아니하니, 도가 있거나 도가 없음에 한결같음이라. ()는 강한 모양이라. ()은 혹 낯빛()이 되니라.

 

[] 正義曰此一節明中庸之道亦兼中國之強이라 子路聞孔子美顏回能擇中庸하고 言己有强이라 問之問强中亦兼有中庸否庾氏云問强中之中庸者이나 此問之亦如論語云子謂顏淵曰用之則行하고 捨之則藏唯我與爾有是夫인저하시니 子路曰子行三軍이면 則誰與之類是也라하니라

정의에 가로대, 이 한 구절은 중용의 도와 또한 나라 가운데의 강함을 아울러 밝힘이라. 자로가 공자께서 안회가 능히 중용을 가림을 찬미하심을 듣고, 말하기를, 자기에게 강함이 있으므로 물음이라. 묻기를, “강함 속에는 또한 아울러 중용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유씨가 이르기를, “강함 속의 중용을 물은 것이라. 그러나 이런 물음은 또한 마치 논어(술이편 제10)에서 선생님께서 안연에게 이르시기를, 쓰이면 행하고 버리면 숨는 것을 오직 나와 네가 이를 두었도다!’라고 하시니, ‘자로가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삼군을 행하신다면 누구와 더불어 하시겠습니까?’라고 한 것과 같은 종류라.”하니라.

 

子曰南方之强與北方之强與抑而强與者語助也而之言女也子路也夫子將答子路之問이로되 且先反問子路하니 言强有多種한대 女今所問問何者之强爲南方爲北方爲中國女所能之强也子路之强行中國之强也

子曰南方之强與北方之强與抑而强與는 억()은 어조사이고, ()라고 말함은 너이니, 너는 자로이니, 부자께서 장차 자로의 물음에 답하시되 또한 먼저 자로에게 반문하니, 말하기를, 강함에는 많은 종류가 있는데 네가 지금 물은 바는 어떤 강함을 물음인가? 남방이 되는가? 북방이 되는가? 나라 안에서 네가 능한 바의 강이 되는가? 자로의 강함은 나라 가운데에서 행하는 강함이라.

 

寬柔以教不報無道南方之强也君子居之者反問旣竟하고 夫子遂爲歷解之시니라 南方謂荊陽之南이니 其地多陽이라 陽氣舒散할새 人情寬緩和柔하니 假令人有無道加己라도 己亦不報하니 和柔爲君子之道云君子居之衽金革死而不厭北方之强也而强者居之者臥席也金革謂軍戎器械也北方沙漠之地其地多陰이라 陰氣褊急故人生剛猛하여 恒好鬬爭이니라 以甲鎧爲席하여 寢宿於中하며 至死不厭非君子所處而强梁者居之니라 然唯云南北하고 不云東西者鄭沖云是必南北互擧蓋與東西俗同故不言也

寬柔以教不報無道南方之强也君子居之는 반문하심을 이윽고 다하고 부자께서 마침내 순서대로 풀이해주심이라. 남방은 형양의 남쪽을 이르니, 그 땅이 양기가 많음이라. 양기는 서서히 흩어지기 때문에 인정이 너그럽고 온화하고 부드러우니, 가령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무도함을 가하더라도 나 또한 보복하지 아니하니 온화하고 부드러움이 군자의 도가 되니라. 그러므로 군자가 거처한다고 이름이라. ‘衽金革死而不厭北方之强也而强者居之는 임()은 눕는 자리이고, 금혁(金革)은 군대의 병기와 도구들이니, 북방의 사막의 땅은 그 땅이 음이 많음이라. 음기는 성급하므로 사람들의 삶이 억세고 사나워 항상 만나면 싸우기를 좋아하니라. 그러므로 갑옷을 자리로 삼아 그 속에서 잠자며 죽음에 이르러도 싫어하지 않음은 군자가 거처할 바가 아니고 강량한 자들이 거처하느니라. 그런데 오직 남북만을 말하고 동서를 말하지 않음은 정충이 이르기를, “이에 반드시 남북을 서로 드는 것은 대개 동서는 풍속이 서로 같으므로 말하지 않음이라.”

갑옷 개 만날 투 노략질할 량 强梁(=彊梁), 黃帝가 지었다는 좌우명인 金人銘彊梁者不得其死라 하여 제 명에 못사는 자를 말함.

 

故君子和而不流强哉矯此以下皆述中國之强也移也亦强貌也不爲南北之强이라 性行和合而不流移하니 心行强哉形貌矯然이니라 中立而不倚强哉矯者中正獨立而不偏倚하니 志意强哉形貌矯然이니라 國有道不變塞焉强哉矯者若國有道守直不變하고 德行充實하니 志意强哉形貌矯然이니라 國無道至死不變强哉矯者若國之無道守善至死라도 性不改變하니 志意强哉形貌矯然이니라

故君子和而不流强哉矯의 이 이하는 다 나라 가운데의 강함을 서술함이라. ()는 옮김이라. ()는 또한 강한 모양이라. 남북의 강함이 되지 않으므로 성품과 행실이 화합하여 옮기지 아니하니, 마음의 행함이 강한지라, 나타나는 모습이 굳세니라. ‘中立而不倚强哉矯는 중정하게 홀로 서서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아니하니, 뜻이 강한지라, 나타나는 모습이 굳세니라. ‘國有道不變塞焉强哉矯는 나라에 도가 있다면 곧게 지킴이 변하지 않고 덕행이 충실하니, 뜻이 강한지라, 나타는 모양이 굳세니라. ‘國無道至死不變强哉矯는 나라의 도가 없다면 선을 지켜 죽음에 이르더라도 성품을 고쳐 변하지 아니하니, 뜻이 강한지라, 나타나는 모습이 굳세니라.

[注疏] 正義曰此抑女之强也何以知之上文旣說三種之强하고 又見南方之强하며 又見北方之强하고 唯抑而之强未見이라 知此經所云者是抑女之强也云流猶移也者하니 以其性和同하여 不流移隨物하고 合和而不移亦中庸之德也云國有道不變以趨時者國雖有道라도 不能隨逐物以求榮利하니 今不改變己志하여 以趨會於時也云矯强貌者矯是壯大之形이라 云强貌也

정의에서 말한 이 抑女之强也는 무엇으로 아는고? 위 문장에서 이미 세 가지 종류의 강함을 설명하고, 또한 남방을 강함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북방의 강함을 보여주었고, 오직 아니, 너의 강함은 아직 보여주지 않음이라. 그러므로 이 경문에서 이른 것이 아니, 너의 강함임을 알 수 있음이라. 이르기를, 는 옮김과 같으니, 그 성품이 온화하면서 한가지이기 때문에 물건을 따라 옮기지 않고, 화합하면서 옮기지 않음은 또한 중용의 덕이라. ‘國有道不變以趨時라고 이른 것은 나라에 모름지기 도가 있더라도 능히 물건을 따라 영리를 구하지 않으니, 이제 나의 뜻을 고쳐서 때로 이해를 따르지 않음이라. ()를 강한 모양이라고 이른 것은 교()는 장대한 모양이므로 강한 모양이라고 이름이라.

 

[章句] 此四者汝之所當强也强貌曰矯矯虎臣是也偏著也未達也國有道不變未達之所守하고 國無道不變平生之所守也此則所謂中庸之不可能者非有以自勝其人欲之私不能擇而守也니라 君子之强孰大於是리오 夫子 以是告子路者所以抑其氣血之强하고 而進之以德義之勇也第十章이라 (此章言勇之事)

이 네 가지는 네가 마땅히 강해야 할 바이라. ()는 굳센 모양이니, (魯頌 泮水篇)에 이르기를, ‘굳세고 굳센 범 같은 신하가 이것이라. ()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붙음이고, ()은 통하지 못함이라. 나라에 도가 있음에 통하지 못함에 지키는 바를 변치 않고, 나라에 도가 없음에 평생토록 지킨 바를 변치 않음이라. 이는 곧 중용의 불가능을 이른 바이니, 스스로 그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기는 이가 아니면 능히 가려서 지키지 못하니라. 군자의 강함이 무엇이 이보다 크리오. 부자께서 이로써 자로에게 고한 것은 그 기혈의 강함을 누르고, 덕의의 용맹으로 나아가게 하심이라. 위는 제10장이라. (이 장은 용맹의 일을 말함이라.)

 

[講說] 남방은 풍기가 유약하여 중으로 말하면 불급한 점이 있고, 북방은 풍기가 강하여 지나친 점이 있다. 그런데 군자는 모든 사람과 잘 화합하되 어느 한쪽으로 흐르지 않아야 한다(和而不流). 주역38번째 화택규(火澤睽)괘 대상전에 上火下澤君子 以하여 同而異니라(위는 불이고 아래는 못이 규니, 군자가 이로써 같으면서 다르니라)고 하였다. 위에는 火動而上의 불(上火)이고, 아래에는 澤動而下의 못(下澤)으로 어긋났다는 것이다. 군자가 이 규괘를 보고 본받아 먼저 어긋남에 참여하여 고치니 이를 同而異이다. 和而不流 또한 도를 따라 사람들과 화합하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흘러가서는 아니 되니 강하고 굳센 자가 아니면 안 된다.

 

공자는 삼천 제자가 있었는데, 제자들의 성품이나 행실 등을 파악해 각각의 과하거나 미흡한 점을 찾아서 가르쳤다. 성격이 급하고 과단한 자로에게 공자는 和而不流, 中立而不倚, 不變塞焉, 至死不變의 네 가지로 가르침을 주었는데 사사로운 욕심을 이겨야만 능히 중용을 가려서 지킬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기혈의 강함을 억제하고 덕과 의리의 용맹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용맹과 관련해서는 맹자가 잘 설명해주고 있다. 孟子양혜왕(梁惠王) 하편에 제나라 선왕(宣王)과 맹자의 문답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王曰大哉言矣寡人有疾하니 寡人好勇하노이다 對曰王請無好小勇하소서 夫撫劍疾視曰彼惡敢當我哉리오하나니 匹夫之勇이라 敵一人者也王請大之하소서(왕이 말하길 훌륭합니다. 말씀이여! 과인이 병통이 있으니 과인은 용맹을 좋아합니다. (맹자께서) 가로대 왕은 청컨대 자근 용맹을 좋아하지 마소서. 칼을 어루만지고 상대방을 노려보며 말하길, ‘네가 어찌 감히 나를 당하겠는가하나니 이것은 필부의 용맹이라.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이니, 왕은 청컨대 용맹을 크게 하소서).” 용맹함에는 작은 용맹(小勇)과 큰 용맹(大勇)이 있는데, 血氣의 용맹은 小勇이고, 義理의 용맹은 大勇이다. 군자가 취하여야 할 용맹은 血氣之勇이 아니라 대용인 義理之勇, 浩然之氣여야 한다. 무릇 뜻()은 기운의 장수요(夫志, 氣之帥), 기운은 뜻의 다음(, 志之次也)이다. 즉 뜻이 기운을 이끌고 나가서 기운을 조절할 수 있어야지, 뜻은 없고 기운만 앞서면 중용을 잃고 온갖 폐단만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氣血의 강을 누르고 덕과 의리의 용맹으로 공부를 해나가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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