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市)가 영국 글로스터시에 코로나19 개인보호장비(PPE·Personal Protective Equipment) 1000세트를 긴급 공수했다. 한국은 3일 현재 치사율(fatality rate) 2.36%에 사망자 273명인 데 비해 영국은 14.2%에 3만9369명에 달하고 있다. 영국 입장에서는 도움이 절실한 형편이다. 그런데 파주시는 왜 인구 약 13만인 글로스터시를 콕 집어서 돕겠다고 나선 것일까.
거기에는 70년에 걸친 인연이 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다(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고 했던가. 파주 시민들이 전쟁 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겠노라(repay war debt to them) 마음을 모은 것이다.
사연은 6·25 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date back to the Korean War). 1951년 4월, 파주 임진강 남쪽엔 영국군 29여단 글로스터대대가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대대 소속 병사들이 모두 글로스터시 출신이어서 글로스터대대로 불렸다. 겨울이 끝나면서 거센 공세가 재개됐다. 4월 22일 어둠이 깃들자 중공군이 대대적인 기습을 시작했다(unleash a massive surprise offensive).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중공군이 임진강 남쪽 험준한 산지와 산등성이로도 밀려들었다(surge across the rugged hills and ridges).
글로스터대대는 다른 유엔연합군에서 고립돼 중공군 3개 사단의 인해전술을 저지하며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다(fight a desperate battle to hold the Chinese human wave).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병사들이 속속 죽어갔다(be cut down). 피비린내나는 전투가 사흘째 이어지던 24일 밤,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른 대대(decimated battalion)는 완전히 포위당했다(be hemmed in on all sides). 그 상태에서도 235 고지 정상에 참호를 파고(dig in at its summit) 끝까지 싸우며 최후의 항전을 이어갔지만(fight to the last round and resist to the last extremity) 결국 나흘 만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임진강 전투' '설마리 전투'로 불리는 이 혈전은 서울 방어 시간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tip the balance), 이후 235 고지는 '글로스터 고지'로 불리게 됐다. 영국군이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치른 가장 피비린내나는 싸움으로 남아있다(remain the bloodiest action).
파주시는 시민 성금을 모아 2014년 추모공원을 확대 조성하고, 글로스터대대 주둔지 근처의 감악산 출렁다리(suspended footbridge)에는 '글로스터 영웅들의 다리'라는 별칭을 붙였다. 글로스터시 인근 나토(NATO) 신속대응군 기지는 '임진 기지(Imjin Barracks)', 군인박물관 근처 도로는 '파주 길'로 명명돼 있으며(be dubbed 'Paju Walk' ), 글로스터 대성당에는 대대장이 북한산 화강암을 손으로 조각했다는 십자가(a cross hand-carved of North Korean granite by the battalion commander)가 걸려있다.
파주시가 보낸 개인보호장비들은 6·25 참전 글로스터대대 병사들과 같은 세대인 노인들이 거주하는 요양원 간병인들에게 우선 지급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