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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75] 계몽 군주 유감

bindol 2020. 10. 9. 05:24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75] 계몽 군주 유감

신상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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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9세기 말 서세동점의 압력에 직면한 일본 지식인들은 세계를 지배하는 서양 문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탐구에 몰두한다. 탐구 끝에 도달한 서양 문명의 핵심은 기독교 사상과 과학적 합리주의의 기묘한 이중주였다. 일본인들이 근대성의 표상으로 특히 주목한 것은 과학적 합리주의의 저변을 관통하는 ‘계몽’ 사조(思潮)였다.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 논문에서 설파한 ‘계몽이란 (의타적)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 ‘과감히 알려 하라.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자유가 주어지면 민중은 스스로를 계몽할 수 있는 존재’ 등의 화두는 일본 근대화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인간의 존엄성, 이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불합리한 속박을 거부하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자율적 인간, 그것이 계몽이 추구하는 근대적 인간상(像)이었다.

일본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계몽 사상이지만, 현재 일본 사회에서 ‘계몽’은 차별적 용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빛을 밝힌다는 의미의 원어인 ‘aufklärung’(독) ‘enlightenment’(영)와 달리 계몽이라는 번역은 우월적 존재가 열등한 대상을 교화한다는 어감을 내포하기에 현대적 맥락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지니고 있는 잠재력을 일깨운다는 의미의 ‘계발(啓發)’이라는 말이 권장되고 있다.

얼마 전 모 유력 진보 인사가 김정은을 ‘계몽군주’에 비유하여 논란이 되었다. 정규 군인이 공식 지휘 계통을 밟아 비무장 표류자에게 총질을 하고 기름을 끼얹어 불태우는 행위는 정상 국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야만적 범죄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같은 인간의 행위라고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북한 동포들을 인간 존엄의 보편성이 통용되지 않는 시대착오적 체제의 공범이자 희생자로 전락시킨 장본인을 계몽군주에 비유하는 것은 그 치하에서 인간성 상실에 고통받는 인민들의 현실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반지성적 궤변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