背邙面洛 浮渭據涇
【本文】
背邙面洛 浮渭據涇 배망면락 부위거경
북망산(北邙山)을 등진 낙양(洛陽) 낙수(洛水)를 대하였고
위수(渭水) 가에 뜬 장안(長安)은 경수(涇水)를 의지했네.
【훈음(訓音)】
背 등 배 邙 산이름 망 面 낯 면 洛 물이름 락 浮 뜰 부 渭 물이름 위 據 의지할 거 涇 물이름 경
【해설(解說)】
앞서 도읍화하(都邑華夏) 동서이경(東西二京)에서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이번에는 지리적 위치를 다루고 있음을 봅니다. 글을 새기면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배망면락(背邙面洛) 북망산(北邙山)을 등진 낙양(洛陽) 낙수(洛水)를 대하였고 문장의 뜻을 이해하기 전에 우선 글자의 자원(字源)을 알아보고 뜻을 새겨 보겠습니다.
배(背)는 육(肉 육달 月) + 북.배(北)의 형성자(形聲字)로, 북.배(北)은 사람의 등 쪽, '북쪽'의 뜻입니다. 육(肉. 月)은 등이란 뜻을 명확히 해 줍니다. 그래서 배(背)는 몸뚱이의 등, '등지다, 배반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망(邙)은 읍(邑.⻏) + 망(亡)의 형성자(形聲字)로, 망(亡)은 죽어 없어지다의 뜻입니다. 여기에 읍(邑)이 더해져 죽은 사람의 무덤이 있는 땅의 뜻을 뜻을 나타냅니다. 무덤이 있는 산이름을 뜻합니다. 흔히 말하는 북망산(北邙山)이 그것입니다.
면(面)은 상형자(象形字)로, 여기에 전문(篆文)을 올릴 수 없는 것이 아쉬운데, 그 전문(篆文)을 보면 사람의 코를 뜻하는 '자(自)' 위에 이마를 뜻하는 '일(一)'을 더하고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는 큰입구[口]를 둘러 사람의 얼굴을 상형한 글자입니다. 지금 쓰는 글자와는 좀 다릅니다만 그것이 변하여 지금의 면(面)이 되었습니다.
락(洛)은 수(水) + 각(各)의 형성자(形聲字)로 물이름을 뜻합니다. 낙수(洛水)를 말합니다.
배망면락(背邙面洛)은 북망산(北邙山)을 등지고 낙수(洛水)를 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배망(背邙)은 북망산을 등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면락(面洛)은 낙수(洛水)를 면(面)하고 있다는 말이니 '낙수(洛水)를 대(對)하고 있다.', '낙수(洛水)를 바라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북망산(北邙山)을 등지고 낙수(洛水)를 대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동서이경(東西二京)의 동경(東京)인 낙양(洛陽)을 말합니다. 이 낙양성(洛陽城)은 뒤로 망산(邙山)을 지고 있고 앞에는 낙수(洛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망산(邙山)은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망산(北邙山)이라 합니다. 동한(東漢) 때와 위(魏)와 진(晉)의 많은 왕후공경(王侯公卿) 등 귀인(貴人)과 명사(名士)들의 장례(葬禮)를 많이 하여 무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망산(北邙山)이라 하면 '죽어서 가는 곳'이란 뜻이 생긴 것입니다.
낙수(洛水)는 황하(黃河)의 지류(支流)입니다. 낙양(洛陽)은 이 낙수(洛水)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황하(黃河)의 지류(支流)로 둘이 있는데, 하나는 섬서성(陝西省) 낙남현(雒南縣)에서 발원(發源)하여, 이수(伊水) 강과 합쳐 황하로 흘러 들어가고, 하나는 섬서성(陝西省) 정변현(定邊縣)에서 발원하여, 위수(渭水) 강과 합쳐 황하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런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낙양(洛陽)은 동주(東周)ㆍ동한(東漢)ㆍ위진(魏晉)ㆍ석조(石趙)ㆍ후위(後魏)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낙양은 불교와 밀접합니다. 후한 때 지어진 중국 최초의 절 백마사(白馬寺)가 낙양에 있습니다. 후위(後魏) 때 낙양으로 도읍을 정한 문성제(文成帝)는 불교를 숭상하여 낙양에 운강석굴(雲岡石窟)을 조성하였고, 효명제(孝明帝) 때의 호태후(胡太后)는 불교사원 건립에 힘썼으며, 효문제(孝文帝) 때는 용문석굴(龍門石窟)을 조성하였습니다. 후위 때는 불교사원 건립과 경전 역출 등에 힘쓰고 불사를 많이 하여 낙양을 중심으로 서역승(西域僧)이 3천 명에 이르고 1천여 개의 사원이 건립되는 등 낙양불교가 만개했었습니다.
부위거경(浮渭據涇) 위수(渭水) 가에 뜬 장안(長安)은 경수(涇水)를 의지했네.
부(浮)는 수(水) + 부(孚)의 형성자(形聲字)로, 부(孚)는 포(包)와 통하여, 둘러싸 부풀다의 뜻입니다. 물 수(水)가 있으므로 물 위로 '부풀어오르다, 뜨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위(渭)는 수(水) + 위(胃)의 형성자(形聲字)로, 위(渭)는 물이름을 말합니다.
거(據)는 수(水) + 거(豦)의 형성자(形聲字)로, 거(豦)는 짐승이 뒤엉켜 있음을 뜻합니다. 여기에 수(手)가 더해져 '손을 서로 얽히게 하다. 의지하다. 기대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경(涇)은 수(水) + 경(巠)의 형성자(形聲字)로, 경(巠)은 똑바르다의 뜻입니다. 물이름을 말합니다.
부위겨경(浮渭據涇)은 위수(渭水)에 떠 있고, 경수(涇水)에 의지했다는 말입니다. 부위(浮渭)는 위수(渭水)에 떠 있다는 말이니, 위수 가에 떠 있다는 말입니다. 위수(渭水)는 감숙성(甘肅省) 위원현(渭源縣)에서 발원(發源)하여, 섬서성(陝西省)을 거쳐 황하로 흘러 들어가는 강을 이름합니다.
거경(據涇)은 경수(涇水)에 의지했다는 말이니, 경수에 웅거(雄據)하여 자리했다는 말입니다. 경수(涇水)는 감숙성(甘肅省) 화평현(化平縣)과 고원현(固原縣) 두 군데서 발원(發源)하여 합류(合流)한 후, 섬서성(陝西省)에 이르러 위수(渭수)로 흘러 들어가는 강을 이름합니다.
그러면 위수(渭水) 가에 떠 있으며, 경수(涇水)를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낙양(洛陽)과 쌍벽을 이루는 도읍지 장안(長安)입니다. 오늘 날에는 서안(西安)이라고 합니다. 장안(長安)은 위수(渭水) 가에 떠 있으며 경수(涇水)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장안(長安)은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일찍이 서주(西周) 시대부터 도읍지로 터 잡았고, 그 후 서진(西秦)ㆍ서한(西漢)ㆍ후주(後周)ㆍ수(隨)ㆍ당(唐)이 도읍지로 정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왕조들이 장안에 도읍하였기에 장안은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 된 것은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10년(67년)에 대월씨국(大月氏國)으로부터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에 의해 전해졌다고 합니다. 후한 이후 많은 왕조들이 불교를 받아들여 불교문화를 만들어 갔는데 동경(東京)인 낙양(洛陽)에 도읍했을 때는 낙양불교가 꽃피웠듯이 서경(西京)인 장안(長安)에 도읍했을 때는 장안불교가 꽃피웠던 것입니다. 특히 당(唐)나라(618~907) 때의 장안은 중국 역대사상 문화, 사회, 대외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시기이며, 실크로드의 종착지인 만큼 비단길을 통하여 다양한 문물이 유입되어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였던 것입니다. 수ㆍ당을 거쳐 장안에 도읍을 하였기에 수많은 사찰이 지어졌으며, 역경사업(譯經事業)이 활발했는데 대표적인 분이 현장(玄奘) 삼장법사(三藏法師)였습니다. 천축(天竺)에 가서 불경을 구해온 현장삼장은 장안의 홍복사(弘福寺)ㆍ자은사(慈恩寺)ㆍ옥화사(玉華寺)에서 수많은 불경을 역경한 바 있습니다. 또한 활발한 선불교(禪佛敎)도 이때 활짝 꽃피웠던 것입니다. 불교가 발달하였기에 신라의 구법승(求法僧)들이 선진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장안에 머물며 수행한 유학승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중국 지도를 보면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은 거리상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웃하고 있습니다. 이번 천자문을 통하여 낙양과 장안에 대하여 간략히 알아보았는데 그 번성했던 옛 도읍지는 당나라 이후에는 도읍지에서 멀어지는 바람에 현재는 옛 명성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나 역사가 깊은 만큼 그 유적과 성지를 찾는 이들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