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한 해를 보내며

bindol 2021. 3. 14. 05:30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한 해를 보내며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한 해를 보내며

골짜기로 가는 긴 뱀처럼
서둘러 해가 넘어가는 때라
눈앞으로 지나는 세월을 보며
오랫동안 상념에 젖어 있다.

나이 든 얼굴은 움츠러들어
귀밑머리엔 서리가 내려앉고
추위는 기세등등하여
나뭇가지엔 눈이 얹혀 있다.

글 읽는 사람이니
스스로 힘써야 할 뿐
청산 밖 세상사야
내가 뭘 알겠는가?

아름다운 약속을 남겨
술동이를 가득 채워놓고서
꽃을 피우는 첫 번째 바람이 불
그날을 기다리노라.


次古韻

赴壑脩鱗日不遲(부학수린일부지)
年光閱眼久尋思(연광열안구심사)
衰容縮瑟霜添鬢(쇠용축슬상첨빈)
寒意憑凌雪在枝(한의빙릉설재지)
黃卷中人須自勉(황권중인수자면)
靑山外事也何知(청산외사야하지)
十分盞酒留佳約(십분잔주유가약)
會待花風第一吹(회대화풍제일취)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 선생이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세밑에 썼다. 세밑에는 잊고 지냈던 세월의 흐름이 의식 속에 들어오고, 내 나이와 건강과 해놓은 일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즐거운 기억에 젖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대개는 주름살 깊어진 얼굴처럼 우울함을 자아낸다. 남이나 세상에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이 나 자신에게 집중할 때다. 성호 같은 철인(哲人)도 청산 밖 세상사는 모르겠다고 했다. 꽃피는 봄에나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갈 여유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